|수필| 어머니의 손맛 – 노덕경 논설위원
미물인 연어가 강원도 남대천에서 북태평양의 알래스카와 베링해협에서 성어成魚로 자라, 모천의 물맛을 못 잊어 회귀回歸한다.
정년퇴직하고 뒤돌아보니 세월이 화살 같이 흘렸다. 태胎를 묻고 자란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 사랑의 손맛이 그립다.
어머니는 어렵고 힘들게 사신 세대다. 일제 36년 치욕과 해방, 혼란의 정부수립, 6.25 동족 난, 흉년과 배고픔의 고통을 감내堪耐해야 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술이 좋아, 안방에 술을 담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동이를 안고 사셨고, 술이 떨어져야 구들장과 미장일을 나가셨다. 어머니는 일곱 형제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 때문에 학교 정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입하나 던다고 열여덟에 무일푼 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사시면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낙동강 삼강주막 주모의 엄대 같이 짧고 긴 금을 새기면서 사셨다. 식구가 많아 춘궁기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고, 장래를 생각하여 고구마 감자로 끼니 때웠고, 간혹 콩나물밥, 무밥은 별식이었다.
그때는 식구는 많고 몸뚱이 하나로 열심히 일해야 풀칠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낮에는 들에서 일하시고 저녁에는 아궁이에 청솔가지로 불 넣어 눈물을 흘리시며 저녁 짓고,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졸음을 참으시며 해진 옷과 양말을 깁고, 열심히 사셨다. 음식과 바느질 솜씨가 하도 메워 이웃집 길흉사에는 품앗이하시고, 이웃에 베풀고는 마음이 편해도 받고는 조증이 나서 못 참으시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야무지고 살림 잘 하신다고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처마 저고리 도, 하얀 고무신도 항상 깨끗하게 다녔다. 살림살이도 반들반들해야 하고, 요즘 말하는 결벽증이다 싶을 정도로 깨끗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고, 아버지께서 피곤하신 날 손발 씻는 것 안 하시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하시고, 겨울에도 놀면 돈 쓴다며 쉬지 않았다. 인근의 채소밭을 사 겨울에는 값을 더 받을 수 있다며 채소를 단으로 묶어 인접 도매상에 넘겼다. 흐린 날은 가족이 새끼틀을 돌려 이웃에 나누고, 대신에 일하는 계절에 품으로 받았다. 이처럼 먹는 것 입는 것 아껴서 해마다 전답을 마련하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사신 분이다.
짐승들도 우리 집에 오면 소, 돼지, 닭, 염소, 개도 잘 자라고 살도 찌고, 새끼도 많이 낳고, 팔 때는 시세가 좋아 재물을 일구었고, 자식들의 학자금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의 건강을 생각하여 농사지은 콩으로 물에 불리어 쭉정이를 가려내고 큰 가마솥에 삶아서 두부를 만들었다. 소쿠리에 볏짚을 깔고, 중간마다 볏짚을 말아 꼽아주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서 전통방식으로 2~3일 발효시키면 구수한 청국장이 되었다. 묵은 김치와 두부, 대파, 매운 고추, 고기 비계 몇 점, 넣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어머니는 계절마다 마른반찬을 준비했다. 풍어일 때, 생선 말리기, 가죽나무 순, 들깨 순, 김, 끝물 고추, 등을 찹쌀가루에 묻혀 말리고, 호박, 박, 토란, 가지, 타서 말렸다. 그리고 감자와 고구마 쪄서 말리고, 곶감도 깎고, 명절에는 막걸리와 각종 강정을 만들어 손님 오시면 향상 융숭하게 상차림을 하셨다.
나의 신혼 시절, 갈아타는 교통이 불편한데도 김치, 간장, 고추장, 된장, 기본 반찬과 각종 마른반찬을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찾아와 자식들 먹는 것 보시고 좋아하셨다. 요즘, 아내가 나름대로 음식을 신경 써 해주는데도 맛이 별로다. 어릴 때의 어머니가 해주던 청국장, 푹 삭은 김치, 배추겉절이, 파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두부, 메밀묵, 도토리묵이 그립다.
지금도 간혹 청국장 식당을 찾아 전통방식으로 띄운 청국장 먹는다. 하얀 쌀밥에 청국장 덤뻑 넣고 나물과 비벼서 김치 한줄기 올려서 먹으면 식감이 아삭아삭하고 밥도둑이 따로 없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손맛이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