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논단| “南冥學의 발원지” 합천 벽한정과 무민당 박인 (3) – 김무만 경영학 박사
浴川(욕천) : 냇물에 몸씻기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은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 천석 맑은 못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 혹시라도 티끌이 오장에 생겨 있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 지금 바로 배를 갈라 저 물에 띄워 보내리
- 향촌에서의 향약과 교육활동
박인은 1624년 41세에 조동정사(釣洞精舍), 1629년 벽연재, 1633년에 용연재, 1639년에 벽한정(碧寒亭)을 각각 건립하여 강학의 장소로 삼고 향촌에서 향약과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용연재(龍淵齋)는 조동의 고사정 뒤에 있다가 후에 벽한정으로 1662년 이건했다. 박인은 용연재와 벽한정에서 학업과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용연재는 인근 삼리(三里)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3등급으로 나누어 농번기를 제외한 봄, 가을에 집중적으로 교육을 하던 곳이다.
용연서원은 박인 사후(死後) 22년 뒤인 1662년(효종 3년)에 건립되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흔적이 없다. 용연서원 건립을 주도한 사람은 박인의 문인들로 홍기범, 심일삼, 송필원 등이다. 1692년(숙종 1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건립자인 합천 율곡 출생 주세붕 선생의 족현손인 주채(周采. 1661-1690)를 소두(疏頭)로 하여 용연서원 사액(賜額)을 위해 연명으로 상소를 한 일이 있다. 이 상소에 참여한 사람은 초계, 삼가, 단성, 고령, 현풍, 창녕, 거창, 의령 등의 영남생원 800여명 이었다. 하지만 정인홍 사후 합천지역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받아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박인은 퇴계, 율곡 등 선현들이 만든 향약의 뜻을 이어 받고 각 향약의 내용을 철충해서 <삼리향약>.을 만들었다. 삼리향약은 洞約이나 面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 향약의 서문(序文)에 “서호일면(西湖一面)” 이라고 나오는데 이곳은 지금의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1,2구 성산리 1구 마을 일원으로 여겨 진다. 이 서문은 박인의 아들 박만(朴曼.박원 前 용주면노인회장 선조)이 쓴 것이다.
박인이 만든 삼리향약은 8개의 조목으로 덕업으로 서로 권하고, 혼인에 서로 부조하고, 환란에 서로 규휼하고, 死喪에 서로 구원하고, 松木을 금양하고, 過惡을 형벌하고, 사업을 분담하고, 春秋로 글을 강습하며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향약은 대부분의 향약이 사족(士族)에 의한 백성들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체제인 것과 달리 사족과 백성이 더불어 실천헤 나가는 방향을 제시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박인의 <삼리향약>은 다른 지방의 향약에서 볼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고, 합천지방의 향토에 적절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헤 놓고 있기 때문에 수암 유진이 <서원향약>에는 없는 내용이 실려 있다며 등사해 갔다고 한다.
박인이 건립한 벽한정(碧寒亭)에는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라는 현판이 있는데 박인이 직접 각인한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박인이 남명의 “敬과義” 사상을 자신을 경계하는 글로 삼고 깊이 체득해 나가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 박인(朴絪)의 연보 개요
박인은 1583년 합천 야로현 우계촌 외가에서 출생하여 7세가 되던 1589년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헸다. 27살인 1609년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앞으로 과거를 포기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부친께 시를 지어 상달하고 스스로 호를 임헌(臨軒)이라 했다. 박인이 부친 박수종에게 올린 <上廢擧業書>라는 칠언절구를 소개한다. 현재 벽한정 기둥에 새겨져 있다.
호월미풍제경천(皓月微風霽景天)
닭밝고 바람불어 비갠 경치 맑았으니
천심징숙귀신경(天心澄肅鬼神驚)
하늘이 맑고 엄숙하니 귀신도 놀라도다
번사이십년전사(翻思二十年前事)
이십년 전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만축괴황오차생(謾逐槐黃誤此生)
부질없이 벼슬 쫓아 인생을 그르쳤네
1612년 30세에 덕천서원에 가서 남명을 배알하고 두류산을 유람했다. 1613년부터 1614년까지는 내암 정인홍에게 3회에 걸쳐 당시 북인이 강행하던 폐모(廢母)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언사(言事)로 피소(被訴)된 한사 강대수에게 편지하여 위유(慰諭)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는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그해 학포(學圃) 정훤의 고산정사에서 겸재(謙齋) 하홍도를 만났다.
1624년(인조2년) 42세에는 경북 칠곡의 광주이씨 석담 이윤우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었으며, 간송(澗松) 조임도가 방문했다. 그리고 1627년 45세에는 경북 상주의 진양정씨 우복 정경세에 의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기도 했다.1628년 46세 때 남명의 3자 조차마로부터 연원록과 연보의 찬술을 부탁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