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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 (46) – 하재효 논설위원

해인사 최치원 선생 유적

3.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당나라 종사관(從事官) 시절
(1) B.C 878년(22세 , 唐나라 僖宗 乾符5年) : 고급 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공부를 하다가 생활이 곤핍해지고, 황소의 난으로 인해 과거시험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의 준비를 중도에 포기하고 당시 회남절도사 고변(高변)의 막하에 있던 고운(顧雲),원낭중(元郎中) 등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고변의 막하로 들어가게 된다. 고운(孤雲) 선생은 고변의 종사관이 되기 전에 여러 수의 시를 통해 그의 치적을 크게 칭송하기도 했다.
(2) B.C 879년(23세,당 희종) : 고변에게 등용된 최고운 선생은 그의 종사관(從事冠)으로 활약하며 약 4년 간 표(表),장(狀),서(書),계(啓),격문(檄文) 등 무려 1만 여수의 공문서(公文書)를 작성하였다.
(3) B.C 880년(24세, 당 희종 廣明 元年) :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어 서족으로 출정하는 데 따라가게 된다. 황소의 봉기는 희종이 수도인 장안을 버리고 몽진할 만큼 그 세력이 강성했다. 낙양을 함락시킨 황소는 비어있는 장안에 진입하여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하였다.
(4) B.C 881년(25세, 광명 2년~中和 元年) :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작성하다. 그 공로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오르다. [격황소서]는 고변의 휘하에서 대필한 것으로 “아무게(某)는 고변을 가리키며 연호가 중화로 개원(改元)되기 직전에 작성되었기에 광명 2년으로 기록되었다.
(5) B.C 882년 (26세,당 희종, 중화 2년) : 당나라 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고보제도회병서]를 짓다.
(6) B.C 883년(27세, 중화3년) : 고변의 막하에서 지은 1만여 편의 글 가운데 선별과정을 거쳐 20권의 책으로 엮으지는데 이 책이 바로 [계원필경집]이다.
(7) B.C 884년(28세, 중화 4년) : 당 희종이 성도(成都)로 몽진(881년) 후 장안을 수복(884년)하는 해이다. 10월 귀국을 결심하고 [사허귀근계(謝許歸勤啓)]를 올리자 당 희종이 송이사(送詒使)로 삼아 조서(詔書)를 내려 허락하다. 본국 사신 김인규(金仁圭), 집 소식을 가지고온 종제 서원(棲遠)과 함께 양주(揚州)를 떠나 금의환향(錦衣還鄕)의 길에 오르다.
고운 선생이 당나라에 채류하면서 부모와 가족 친구들을 몹시 그리워하는 담은 시 두편을 소개한다.(최고운 지음, 최영성 역주)

< 우강역 정자에서>
모랫벌에 말 세우고 돌아갈 배 기다리는데 / 한 줄기 연파(煙波)는 만고 시름을 자아낸다.
곧장 산이 평지되고 강물이 마른다면 / 인간 세상에 이별이 비로소 그치련만.

<산양(山陽)에서 고향 친구와 작별하며>
서로 만나 잠시 초산의 봄을 즐기다가 / 또다시 헤어지려니 수건에 눈물 흠뻑 젖었네.
봄바람 앞에 시름없이 바라만 보는 것을 괴이타 마소 / 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나기가 참으 로 어렵다오.

  • 참고 문헌 1) 고운 최치원 선생 문집 하(최치원 지음.최영성 역주)
    2) 고운 최치원의 삶과 합천(한정호 경남대학교 교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