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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삼가 의병단 기념비, 그 역사적 의미(비문) – 조찬용 남명선생선양회장

삼가(三嘉)의병단(義兵團) 100여명은 집권 노론(老論)의 무능·부패와 교조적 국가운영으로 나라가 망할 쯤에, 삼가 합천 단성 산청 안의 함양 거창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 분견대 등과 의병전쟁을 벌이며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했다. 이때 의병대장 신상호(申相鎬) 박수길 김화서를 비롯한 김팔룡 심낙준 한치문 이차봉 장명언 성만석 이두익 김우옥 김응오 김화숙 김찬숙 이소봉은 순국했다. 전성구(全聖九) 최남수 김재한 전재관 김유준 변원석(元石) 오낙삼 김문점 김상래 송영수는 5년~10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6명은 애국장으로 9명은 애족장을 추서(追敍)했다.
정미7조약으로 촉발된 제2차 의병전쟁(1907~1909) 때 일제(日帝)와 싸움에서 희생한 분들이다. 돈과 권력 대신 정의와 애향과 애국을 선택한 지사(志士)다. 이를 기념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다. 더욱이 고향 산하(山河)를 파괴하는 LNG-태양광 발전소 건립을 무지한 합천군수와 군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는 때에 삼가 의병단을 기억하는 것은 뜻깊다.
백악산(白岳山)과 우두산(牛頭山, 가야산) 정기(精氣)서린 삼가와 합천은 예부터 기절(氣節)과 실사구시, 민본(民本)과 기득권에 저항하는 정신이 충만한 고장이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1555)와 무진봉사(戊辰封事, 1568),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의 사의 장봉사(辭義將封事, 1593)와 정맥고풍변(正脈高風, 1606)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삼가의병단의 살신성인(殺身成仁)과, 삼가 대양(합천) 대병 초계 묘산 3·1만세운동 때 일제의 총칼에 격렬하게 맞서다 공재규 등 50여명이 순국한 것에서도 증명된다.
1919년 3·1혁명 후 삼가청년회(조기순), 합천청년회(박운표), 초계청년회 (정두은)가 결성돼 상해 임시정부 지원과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에 동참했다. 윤재현은 가회 구음의숙(陰義塾)을, 송필영 대병 삼일의숙(三一義塾), 노호용은 초계 정양의숙(正養義塾)을 설립하여 후세 교육에 힘썼다.
1923년 삼가청년회 변영철(朴英哲) 박태진 등은 백정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 등에 앞장섰다. 삼가청년회 최창섭은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 때 조봉암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돼 ‘혁신 총회’를 기치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1925년 결성한 합천청년연합회는 노동우애회(勞動友愛會)를 매개로 소작료와 소작쟁의 해결에 적극 개입했으며, 신간회(新幹會)와 함께 반일 민족의식 고취에도 헌신했고, 기사년(1929) 삼가 대홍수 때도 책무를 다했다.
1928년 6월, 삼가(조순규)·상백(정의규)·백산(김병규)·가회(윤병규)·대병(송헌식) 주민들이 성금을 모으고, 합천군학교평의회(陝川郡學校評議會) 의결 등을 거쳐 군내 유일의 2년제 중등학교인 삼가농업보습학교(1928~1938)를 지금의 삼가초등학교 자리에 설립했다. 10년 뒤 강신부 이정근 조기준(曺基淳) 강석황 고목이삼(高木二三) 등 이전 반대투쟁위의 결사반대에도 농업보습학교가 강제 이전돼 합천 농업실 수학교(합천 중·고등학교)로 개교했다.
7년 후 해방이 되고 1946년 3월에 삼가·쌍백(상백+백산)·가회·대병 등 옛 삼가현 주민들이 삼가 일민중학교(三嘉-民中學校) 설립추진위원회(회장 조기순, 부회장 최창섭), 즉 ‘일민회(一民會)’를 다시 조직하여 1952년 5월 8일 합천군 최초로 삼가일민중학교(6학급, 삼가중학교)를 개교했다. 교가 “우두산 정기 벋쳐”처럼 꿈은 장대했다. 이처럼 삼가 의병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컸다.
2021년 3월 18일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근찬
기념비 건립에 남명선생 선양회와 삼가·쌍백 LNG-태양광 발전소 건립 반대투쟁위원장(조용호) 등이 힘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