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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역사다(10) – 통치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 권길홍 수필가

전쟁후 가난, 하고싶어도 할 수 없었던 공부, 월남전 파병, 개발지상주의 폐해, 민주주의 항거 등 한국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현재 20여 년의 공직을 마무리 짓고 귀촌했다. 국민소득3만달러를 돌파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어떤 고난과 아픔을 가졌는지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역사다./권길홍=gapowon@naver.com

(카터의 철군정책 파장과 통치자의 진면목)

79년 중반인가 미국의 월터 먼데일 부통령이 특사로 파견되어 우리나라의 국방관련 문제를 의논하면서, 카터의 대통령 출마 공약인 ‘주한미군을 철군하겠다’고 통고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무척 화를 내며 만약 한국의 승낙 없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한국을 떠나는 미국 부통령이 탄 비행기를 먼저 격추시키고 난 후 우리 군대를 이끌고 단독으로 북한에 쳐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야담 아닌 야사를 정말 풍문으로 들었다.
그 후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으로 이 문제를 확정짓기 위해 왔었는데 이때의 숙소가 우리나라에서 제공한 영빈관이나 호텔이 아니라, 오산에 있는 미군기지였다. 철군 얘기가 나와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부산 서면에 있는 내가 근무한 직장 부근의 하야리야 주한미군 부대에 이 당시 계속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군수품을 싣고 한 달 가량을 계속 날아다니며 떴다 내렸던 사실이 있었다.
이런 풍문에 의한 글을 정말 악착같이 머릿속에 간직해둔 이유는 그래도 한나라의 지도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통치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깊이 느끼고 있었는데, 무려 30년이 지난 후에 이 글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는 책을 입수했다. 그것도 주한미국대사가 직접 쓴 자신의 글로!
이 얼토당토않고, 사실일지도 모르는 얘기를 굳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국방정책이 아무리 미국에 의지하고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주한미국대사가 직접 쓴 글에서 기록된 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주관을 개입시켰다는 거다. 미국이라는 강대국도 우리가 주장하면 우리 의사대로 따라오고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우리 외교당국자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 중 일부는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이유가 미국만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에 주둔한다는 식으로 인식한다는 건 무얼 알아도 크게 잘못 이해하거나 부분만 알고 있다. 나토니 북대서양조약이니 하며 또 아세안이라는 동남아 국가의 연합 조직도 마찬가지로 세계는 무한정 얽히고 엮어지면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전력투구하는데!
현대의 국제정세는 한나라의 단독적 자주국방도 필요하지만 이웃나라들 간의 지역적 힘을 모은 후 자신의 힘도 길러야 자주국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이런 국제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잊어버리면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여기에 인용한 몇 줄의 글은 미국의 카터 대통령 임기 중에 주한 미대사를 역임했던 글라이스턴이 쓴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있는 글이다. 우리의 짐작이나 예상과는 너무 다른 글이라 다 함께 생각하기 위해 올린다.
미국 대통령인 카터가 대통령 출마할 때 내건 공약 가운데 ‘주한미군 철수’도 있었다. 당선이 된 후 한국을 방문하여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최후통첩성 회담을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카터 대통령의 허울뿐인 철군 정책에 반대한다.
<박 대통령은 공동성명을 통해 철군의 중단을 확약할 것을 요구하고 또 한국의 안보를 담보로 한 어떠한 외교적 노력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주한미군은 한국방위뿐 아니라 일본과 동아시아 전체의 안보를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의 철군이 이뤄지지 않을 것을 요청했다.>
이런 글을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썼다면 믿을 수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니 당연히 자신을 미화시키려 쓴 글이라 단정하지 않았을까? 경제적으로나 국방에서 미국의 도움이나 받으면서 매사에 미국의 눈치나 보는 주제에 미국을 향해 우리의 주장을 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도 우리 같은 후진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외교나 국방의 모든 일은 당연히 미국의 뜻에 따라 처리되고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따라갈 거라고 짐작을 하기 쉽다.
그런데! <나(글라이스틴)는 과거 여러 번 정상회담에 배석한 경험이 있지만 그날 카터와 박정희 대통령처럼 회담 자체를 엉망으로 만든 지도자들을 본 적이 없었다.>
<두 대통령은 신랄한 설전을 계속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사람인 모양이다. 아무리 우리가 미국의 도움과 원조를 받지만 우리의 국익에 반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악착같이 달려들 듯하며 담판을 짓는 걸 볼 수가 있다.
게다가 또! <나(글라이스틴)는 카터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면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은 한·미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외에도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의 고위 외교관으로서 개인적 실패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글라이스틴)는 사임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며, 외교관 생활도 이것으로 마감해야 할 건지,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나(글라이스틴)는 내 생각과 사임 의사를 밴스 장관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대사가 이런 글을 썼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글이다. 무엇이 글라이스틴 대사를 움직여 정말 미국의 도움이나 받는 나라인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의 편을 들어 주한 미대사직까지도 던져버릴 각오를 하게 했으며, 외교관 직책도 마감해야겠다고 작정하게 만들었을까? 정말 무엇이 이 분을 움직였을까?
이런 치열한 공방 뒤에 카터가 한국을 떠나는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글라이스틴 대사를 마음껏 품어주면서 너무 기분 좋은 신뢰를 보여준다. 이 두 분의 사이가 강대국인 미국의 대사와 약소국인 한국의 대통령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미국대통령 전용기가 이륙한 후 평소 무뚝뚝하고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던 박 대통령이 나(글라이스틴)를 보고 감사의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글라이스틴)를 껴안는 즉흥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엄한 박정희 대통령이 정말 절친한 친구 사이나 서로 믿고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한다. 정말 우린 너무 좋은 대통령을 모셨고, 글라이스틴이라는 좋은 친구를 가진 복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아무리 우리 한국이 미국의 도움을 받는 나라지만 미국의 의사와 우리의 이익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요구할 건 요구하는 박정희라는 통치자의 진면목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미국의 대사까지도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여 대사 자신이 외교관직을 마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자신의 임명권자인 카터 대통령의 생각보다 후진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따르고,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뜻만 고집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작정하는 미국의 대사!
후진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사임까지도 고려할 만큼 무엇이 글라이스틴 대사를 움직였을까? 이런 역사의 뒤편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것 같다. 무엇이 이 분을 감동시켰고 어떤 이유로 우리의 입장을 지지했을까?
아무리 미국의 카터가 철군정책이라는 미국대통령 공약사항을 실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대사인 글라이스틴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압박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심지어는 상대나라의 대사까지도 자신을 믿게 만들면서 우리의 뜻을 관철한다. 그렇다면 통치자는 통치에 대한 확신이나 집념도 보여야 하지만 개인이 가진 매력이나 인간적인 정도 철철 넘치도록 간직해야 하는 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건 ‘통치자는 어떤 생각으로 강대국을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통치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상대 나라의 대사나 국민들에게 비칠까’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하는 건 한나라의 통치자란 어떠해야 되는가? 또 우리의 통치자는 상대 나라에 대해 자국의 사정을 끊임없이 인식시키고 우리 뜻대로 따라오도록 하는 용기와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라도 우리 국가의 국익을 위해 군대를 주둔하거나 철수하는 문제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걸 주장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을 신뢰하듯 미국도 철군이나 대북정책에서 항상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의논하여 결정해야 한다.
또 이와는 별개의 문제로, 오래전 60년대의 우리나라 최초인 외국의 차관을 얻기 위해 독일의 뤼프케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정말 거지나라(정말 이때는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는)의 정통성 없다는 젊은 박정희가 요청한 차관을 승인한 독일의 노대통령을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파독광부나 간호사의 봉급을 담보로 차관을 주었다고? 그 돈의 임자는 누군데? 독재자니, 정통성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얘기는 우리나라라는 좁은 연못 안에서의 단세포적인 생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