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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역사다(36) |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내 생애 최고의 잔치 – 권길홍 수필가

  1. 내 글의 주제가 거창하다
    내 글에서는 지나간 과거 얘기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내게 주어진 여유나 편안함이 내가 노력해서 되었다기보다 전부 이 나라가 내게 베풀어준 덕분이고, 나라가 경제정책을 잘 기획, 수립하여 경제가 발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겸손해서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다. 정말 나는 나의 노력보다도 내 나라의 경제성장 때문에 내가 잘 살고 있고, 잘 살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정말 내 재주로는 공부 조금 잘한 덕분에 공무원시험인 9급에 두 번, 7급 시험에 한 번 합격한 것뿐이다. 오래 된 얘기지만 68년도 부산시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받았던 봉급은 입에 풀칠도 못하는 박봉이라 무려 십몇 대 일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해봐야 내 마음에 흡족한 건 조금도 없었다. 그 후에 공무원으로 오래 근무하게 되어 봉급이 인상 되었어도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전체가 잘살게 되니 봉급도 덩달아 올라가 풍족하지는 않지만 의식주는 해결 될 만큼은 받게 되었다. 내 노력이라고는 근무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금 열심히 일했던 그 일이 전부였는데, 국가가 발전하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여유로워지고 생활도 나아지게 되고 저절로 나까지도 조금씩 여유로워졌다고 믿는다.
    내 나라가 잘 살면서 내가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비록 중소기업이지만 조선소 임원이 되어 외국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러니 내가 사랑이니 인생을 논한다는 게 다 하찮은 일로 느껴졌지만, 우리나라의 정치가 잘 안 돌아간다 싶으면 걱정이 되고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화를 내거나 꾸짖게 된다.
    지금도 우리 집안일로는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는 관심도 없지만, 이 나라의 정책이 잘못된다 여겨지면 가차 없는 비판을 하게 된다. 그래서 TV에서 사랑얘기가 흘러나오고 가족들 얘기가 나와도 재미를 못 느껴 채널을 돌려버린다. 연속극 같은 거 아무리 보아야 순간적인 재미는 줄지 모르지만 내 행복에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없다고 느껴진다. 반대로 우리 정부 정책의 흐름이나 집행은 항상 내게 비중도 훨씬 컸고 더 중요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도 따져보면 내 못살았던 과거의 버릇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한 것도 내가 잘나서 그리 된 것보다 정부의 정책이 워낙 훌륭해서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군대도 안 가고 부모 잘 만나 좋은 대학 간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내가 대학원까지 졸업하여 지식인인 체를 할 수 있었던 건 국민학교 과정을 의무교육제로 한 이승만 대통령의 덕택이고, 목구멍에 풀칠할 수 있었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건 박정희 대통령이 펼친 경제개발 정책 때문이라 생각하여 이 나라에 고마워한다.
    위에서 한 말로 우리 6,70대가 너무 대국적이라거나 너무 큰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고를 하도록 한 건 전부 우리 노인들이 겪었던 혹독한 가난 탓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젊은 세대는 자신이 노력하면 비록 낮은 임금을 받지만 일할 수 있고, 남들이 잘 가지 않으려 하는 공장이나 흔히들 말하는 3D 업종에서 돈 벌 수는 있다. 또 젊은이들 자신이 나가고자 하면 외국에도 마음대로 나가서 새로운 문물을 배울 수 있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며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고 주변의 환경도 그리 돼 있다.
    그러나 지금의 6,70대인 우리 노인세대는 그 당시에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해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 해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아무리 시시하고 하찮은 직장을 구하려 해도 없었다. 외국에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해보려 해도 나갈 여비나 돈도 없었지만 나라 전체에 외화가 없으니 나갈 수 있도록 출국승인도 안 해주었다. 간단히 일본에 가서 돈을 벌려 해도 비정상적인 일본행 밀수선을 타고 나가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해외도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자! 여기에서 우리 세대와 다른, 젊은 세대들은 우리가 꾸었던 꿈보다도 훨씬 큰 걸 목표로 잡을 수도 있고 더 활동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게 되었다. 정말 우리처럼 지나간 늙은 세대는 꿈도 꿀 여유도 없을 정도로 환경도 뒷받침되지 않았고 나라에서 받쳐줄 힘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고작 원양어선을 타거나 중동에 건설노무자로 나가는 게 전부 다였다. 이런 사정이니 서독의 광부로 나가는 것도 대졸자들 위주로 뽑았고 병원의 시체를 닦고 처리하며 주무르는 일도 우리 간호사들이 했다.
    그래서 우리 청년들은 나라에서 여러분들을 못 가게 막지 않는다면 세계 어디로든 나가서 여러분들의 꿈을 펼쳐야 하는 건 아닐까?
  2.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전후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가수라면 조용필이나 나훈아가 최고라 생각하여 당연히 조용필의 88올림픽을 주제로 한 “서울 서울 서울”이 올림픽의 노래로 지정되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벽을 넘어서”라는 노래가 88올림픽 지정곡이 되었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하면서 감미롭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 조용필의 노래를 제치고!
    내 판단이지만 이 노래의 작곡가나 가수들은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름도 잘 모르는 <코리아나>라는 가수그룹이었다. 그런데도 이 노래가 지정된 이유를 내 나름으로 짐작해보면 “벽을 넘어서”라는 노래의 제목과 가사에서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남북문제에서도 항상 아웅다웅하며 작은 일과 큰일을 가리지 않고 매사에 부딪치던 남북의 이념이나 체제에서 또 감정의 벽도 넘고 싶었고, 잘 살았던 선진국과 가난한 후진국의 차별에, 문화적으로도 격차를 보였던 동양과 서양이라는 벽을 올림픽이라는 세계적 화합의 잔치를 빌미로 뛰어넘고 싶었던 우리의 염원이 담긴 노래에다 올림픽의 이념에도 맞았기에 지정이 되지 않았을까.
    그 당시 우리나라의 멋진 자신감과 활기찬 분위기를 잘 반영한 노래였고, 올림픽 개최 당시에는 아직 개발도상국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나라의 올림픽을 빛내주면서 즐겁게 해준 노래라고 기억한다.
    한국의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고 시기하는 나라도 있었고, 특히 북한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군사위협도 서슴없이 하면서 공갈을 쳤고, 그러나 우리는 한마음으로 뭉쳐서 그런 반대나 방해를 물리쳤다. 심지어 우리나라 안에서도 올림픽을 해외 선진국들과 겨루어 따올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도 없어 쩔쩔매고 있을 때 정주영회장님은 단호하게 그 일을 맡아 하셔서 성공시켰다. 그래서 더 자부심을 느끼며 함께 기뻐한 우리나라 국민들이었고 화합의 잔치인 88올림픽이었다.
    이렇게 1988년도의 세계올림픽을 치룬 일은, 내 생애를 통털어서 몇 안 되는 진심으로 기뻐한 큰일이었다. 마음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너무 큰 민족적 긍지와 즐거움을 안겨준 행사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1988년을 보냈지만 2002년도의 월드컵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축구에서 세계의 강적을 물리치고 달성한 4위라는 실력, 세계 4위를 달성했다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즐기며 놀았던 행사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빈국이었고 6.25라는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겨우 헤쳐 나와 너무 가난해서 허리도 제대로 펼 수 없었던 나라가 흥겹게 뛰고 놀며 함께 어우러진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내가 살던 합천에서도 황강 아래에서 캠핑을 하며 응원전을 펼칠 정도로 전국민이 즐기며 응원을 했는데 이런 걸 본 외국의 언론들이 더 놀랬다.
    세계가 놀랐던 세계 최빈국으로만 알았던 우리 대한민국의 흥과 끼! 함께 뛰며 즐기는 광장의 문화는 서구와 같은 선진국의 전유물인줄 알았고, 가난에 찌들리어 기도 펴지 못하고 움츠려 지냈던 내성적인 우리 민족이라고 알았는데 아니었다. 광장에서 즐기고 뛰어놀 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고 우리 국민들이라는 사실에 우리 자신들도 놀랐다. 우리가 언제 저런 흥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그 끼를 발산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우리가 우리들의 모습에 더 놀란 일이었다. 축구에서 4강을 달성한 실력에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열정이 마구 발산된 놀이, 그게 바로 2002년 세계월드컵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