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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30) 윤탁 장군과 함께 신도비 세워지는 조선시대 문신(文臣), 추담 윤선

추담 윤선은, 신도비가 나란히 서고 있는 구산 윤탁 장군과 같은 조선시대 세대에 같은 가회 구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신도비 :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
그 신도비 게시판의 윤선 소개로는, “임진왜란 때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수행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우참찬 :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2품 관직. 정원은 1인. 좌찬성, 우찬성, 좌참찬과 함께 3의정을 보좌하고 대소의 국정에 참여하였다. 판서와 교체되는 형식상 관직으로부터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요직이었다.
윤선의 생애는 이렇다.
1559년 삼가현 구평(현재 가회면)에서 출생. 1582년(선조 15) 진사시(문예창작 재능시험)에 합격. 15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록 전적, 승문원정자, 홍문관박사 등을 역임.
1592년 고향에서 임진왜란 소식을 듣고 상경하였는데, 선조가 이미 의주로 떠나자 즉시 쫓아갔다. 선조가 충절을 가상히 여겨 사헌부장령에 임명하고,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수행하게 하고, 종묘의 신주를 봉행하게 하였다.
1601년 부안현감을 거쳐 1603년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고, 1605년 예조,호조의 참의를 역임. 1606년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의 우승지,도승지,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병조참판, 예조참판을 역임.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로 인하여 인목완후가 구금되자, 위촐을 시켜 쌀과 고기를 헌납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자 윤선은 공궤(윗사람에게 음식을 드림)를 하지 않으면 만세(萬世)에 불효의 이름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광해군을 설득하여, 광해군이 공궤를 끊지 않게 하였다.
1614년 주문사(秦文使)로 중국을 다녀왔고, 1617년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조경기, 홍무적 등이 시사를 항언하여 광해군이 조경기, 홍무적을 죽이려고 하자, 극력 주선하여 구원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여 다시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지내 1637년 일생을 마쳤다.
현재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추담문집”은 윤선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0년에 건행한 시문집이다. 이 중 “진주목사윤공행장”은 종형 윤탁장군의 행장기록이다.
윤탁, 윤선 신도비 가까운 곳에 “회계서당”이 있다. 이것은 윤선의 공적과 학덕을 기리고 그의 충효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18년에 지어졌다. 강당, 동재, 서재, 대문채의 건물 네채로 이루어지는 “ㅁ”자형의 예술적 구조이며, 옛부터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지역어린이들의 현장학습코스이었다. /마유미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