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되면
이호석
논설위원
보름 전쯤부터 TV를 통해 우리나라 전역이 장마기에 접어들고, 우리 지역에도 장맛비가 내린다고 예고를 해왔다. 그런데도 매일 같이 구름만 짙게 깔리고 어쩌다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정도여서 가뭄에 찌든 농심을 애태웠다. 재작년까지 만해도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자주 틀려 불신을 받으며 욕을 먹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관측 장비가 좋아졌는지 예보가 거의 적중하여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또 이번 장맛비 예보는 자꾸 틀렸다.
이렇게 장마기에 비가 올듯 올듯하면서 오지 않는 것을 두고 ‘건장마’라고 한다. 건장마가 들 때는 농부들이나 농작물이 더 심한 갈증을 느낀다. 곧 비가 쏟아질 듯 한 날씨 때문에 채소밭에 물을 주지 않고, 이제나저제나 하늘만 쳐다보다 보면 금방 일주일이 가고 열흘이 지나면서 농작물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번 장마도 어제까지 계속 갈증만 주더니만, 오늘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처럼 비다운 비가 주룩주룩 내려 모두가 좋아했다. 농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산야의 식물들이 목을 축이며 너울너울 춤을 춘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 회관으로 놀러 갔다. 주민 대다수가 농사꾼이라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오니 모두 좋아하며 분위기도 넉넉해 보인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구름이 더욱 짙어지면서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번개 뇌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차츰 잦아지고 소리도 커지더니 마치 바로 옆집에 벼락이 떨어진 듯 요란하여 모두가 잠시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심한 천둥소리는 언제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예부터 마을 주변 야산의 큰 소나무에 가끔 벼락이 떨어져 나뭇가지가 찢어지고 나무가 타 죽는 것을 보았다. 어릴 적에 흔히 어른들이 죄지은 사람보고 “벼락 맞아 죽을 놈”이라고 비난하고, 죄지으면 벼락 맞는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그런 줄 알고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또 천둥이 무섭게 치는 날이면, 혹시 내가 무슨 죄를 짓지 않았는지 걱정을 하며 지레 겁먹을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매년 6월 중·하순경이 되면 어김없이 장마철로 접어든다. 보통 모내기가 끝나고 모든 농작물이 활착하여 무성해지는 시기에 들지만, 어떤 해는 보리 수확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마가 들어 농민들을 애태우기도 했다. 장마 기간이 길고 비가 많이 내리는 해에는 연약한 채소 잎들이 녹아 버리는 등 농작물 피해가 심했고, 가끔 올같이 건장마로 끝나버리면 농민들이 가뭄으로 큰 고생을 하고, 흉년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장맛비가 올 때면 필자는 가끔 어릴 적 장마철 풍경을 떠오른다. 초여름의 무더위가 들이닥치고 온 식구가 밀·보리타작과 감자, 마늘 캐기 등 봄 곡식 수확을 하느라고 새까맣게 그슬려 있지만, 장맛비가 오면 온 식구들이 잠시 편안한 마음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며칠간 비가 계속 내리면 여름철이라도 기온이 내려가고 방안이 눅눅하여 가끔 군불을 땐다. 이를 때는 약간 따뜻한 구둘 막이 좋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짚으로 만든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삽을 들고 이 골짝 저 골짝 논밭을 뛰어다니며 수해가 나지 않도록 고생을 하셨고, 할머니는 담배 연기로 흐릿한 작은방에 앉아 부채질 하면서 연신 화롯가에 담뱃대를 떨었으며, 우리는 사랑방에 모여 잡담을 하거나 낮잠을 자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온 식구들이 장맛비 덕분에 편히 쉬고 있을 때도 어머님은 잠시도 쉬지를 못했다. 계속 비가 내려 마른 나무가 없으면 보리대로 하루 세끼 끼니를 준비해야 했고, 열 식구가 넘는 가족들이 비 땀에 젖어 수시로 벗어놓는 수북한 옷을 틈틈이 빨래하여 말려야 했다. 그리고 모처럼 장맛비 덕분에 쉬고 있는 식구들에게 무슨 군것질거리를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
6,70연대 군것질거리는 주로 개떡이었다. 개떡은 햇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보리 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어 찐 것인데, 시커멓고 약간은 거칠지만 꿀아재비(사카린)를 넣어 쪄 주면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전히 사카린 맛으로 먹었던 것 같다. 또 콩이나 밀을 볶아 주기도 하고, 감자를 삶아 주기도 했다. 지금 아이들은 잘 먹지도 않을 것들이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모두 꿀맛 같은 간식이었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되면 시커먼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세네가지 나물 반찬과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맛있게 먹기도 했고, 또 저녁때가 되면 풋고추와 애호박, 감자를 쓸어 넣은 수제비를 종종 끓여 먹기도 했다. 억센 보리밥을 먹던 시절의 수제비는 쌀밥보다 더 맛있었다. 온 식구가 마루에 둘러앉아 후룩 후룩 수제비 먹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장마철이 되면 오리(五里) 자갈길을 비 맞으며 타박타박 걸어 다녀야 하는 일도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우의가 제대로 없어 비닐 쪼가리를 덮어쓰거나 찢어진 비닐우산을 받쳐 들고 뛰다시피 다녀야 했고, 가끔은 지나가는 차들이 길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튕겨 누런 황톳물에 옷을 몽땅 버리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군(軍)에 입대하던 해인 1967년 7월,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밤낮으로 농사일을 거들며, 삼대 열 식구가 넘는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가끔은 시어머니와 남편의 짜증스런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오직 참고 희생만 해야 했으니, 그 몸이 쇳덩이라도 어찌 견뎌냈을까 싶다. 지금 생각하면 심신이 골병으로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너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