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앞의 여유 / 이호석 수필가
내가 자동차를 최초 운전한 것은 1970년대 초 군 생활을 할 때였고, 그 후 승용차를 운전한 것은 1980년경으로 생각된다. 그때만 해도 합천읍 소재지는 중앙도로 일부만 콘크리트 포장도로였고, 변두리 도로와 이곳을 지나가는 국도는 모두 비포장도로였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도로 바닥의 자갈이 튀어나와 이를 피하려고 애를 써야 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흙탕물이 튀어 옷을 버리기도 했다. 그때는 차가 다니는 길에서는 항상 자동차 왕래가 우선이었고 사람이 건너다니는 ‘횡단보도’란 말도, 표식도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도와 시가지 도로가 모두 아스팔트 길로 바뀌었고, 이어서 본격적인 자가용 시대가 도래 했다. 그때부터 자동차는 내 몸의 일부와 같았다. 가까운 거리에도 무조건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읍 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곳을 왕래하는데도 자동차는 필수품이었다.
비포장도로 때부터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행자 모두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서는 항상 차가 우선이고 사람은 자동차를 피해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오랫동안 그런 생각으로 살다 보니 도로에서 자동차 운전에 방해가 되게 걷는 사람을 보면 운전자는 예사로 경적을 울리며 좋지 않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자동차는 보통 어느 곳이나 빨리 가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인지 운전석에 앉으면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바빠지고 성격도 급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까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항상 자동차가 먼저 지나가는 것이 관습화되었다.
그러다가 2023년부터인가 어느 도로에서든지 횡단보도 양측에 사람이 있으면 일단 자동차가 정지하고 사람이 먼저 건너가도록 교통 법규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운전자나 보행자 모두 이를 지키기가 어색했다. 횡단보도 양측에 사람이 있어도 예사로 자동차가 먼저 지나갔고, 횡단보도 앞에 정차를 해도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자동차를 먼저 가라고 손짓까지 하였다.
나는 새로운 교통법규를 지키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 다닐 때 횡단보도 양측에 한 사람이라도 보이면 반드시 정차하고 먼저 지나가도록 손짓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의 마음에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가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는 것은 교통법규를 지키기 위함인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마치 큰 양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지 기분 좋게 지나간다. 길을 건너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거나 목례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여유와 즐거움은 물론 작은 행복감마저 느끼게 된다.
어떨 때는 차 안에서 혼자 목례하는데 여러 사람이 지나가며 인사를 할 때는 내가 무슨 이득이라도 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동차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거나 잠시 브레이크를 밟기 싫어서 그냥 지나간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지역(읍면 소재지)과 같은 소도시에서나 느낄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이고 느낌이지 싶다. 시가지 도로가 거의 왕복 2차선 이내 도로이기 때문에 운전자나 보행자가 서로 빤히 볼 수가 있고 그중 몇 사람은 평소 아는 사람이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대도시와 같이 도로가 넓거나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이런 소소한 마음을 느낄 여유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횡단보도 앞에서 먼저 정차한다고 매양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횡단보도를 건널 사람인데도 내가 정차를 하고 지나가라고 손짓을 해도 나를 힐끗 쳐다보고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엉뚱한 방향을 보면서 본체만체할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내가 너무 과잉 양보를 하나 싶기도 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도 그에 맞는 교양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아무튼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우선 건너게 하는 바람에 자동차만 타면 괜히 바쁜 척 달리던 나의 운전 습관을 뒤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또 평소 느끼지 못했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과 밝은 마음으로 교감할 수도 있어 좋은 것 같다.
나는 횡단보도 앞 잠깐의 정차에서 얻는 여유를 나의 일상에 비교하며 반성해 본다. 평소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며 바로 직진하는 모습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잠깐의 정차로 지나가는 여러 사람이 밝고 즐거워하듯이 평소 나의 일상에서도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하고 소통한다면 더욱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