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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숨겨진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1) – 이병생 전 합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1.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은 어떤 경로로 해인사에 왔을까?
    해인사 장경판전은 1398년(조선태조7년)창건된 이후 1458년(세조4년)세조에 의해 중수되었고, 1488년(성종19년) 학조스님에 의해 중건되고, 광해군14년(1622년)에 수다라장을 중수하고, 1624년에는 법보전도 중수하였다. 그 다음 1965년 또 한번 중수를 거친 건물이다. 이때 장경판전의 지붕을 해체 했을 때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이 나와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 해인사로 들어온 경위
    내암 정인홍선생이 87세 때 고령과 병환으로 있을 때 광해임금이 문병 차 오려고 하다가 비인 유 氏를 상궁과 함께 내려 보내 내암선생을 위무하고, 1622년 그날 저녁 해인사에 들려 불공을 드린 후 떠났는데, 내려오면서 광해임금 내외분과 상궁의 옷을 가지고 내려와 불공할 때 놓았던 것이라 한다. 광해임금의 포(袍)의 안자락에 을해생 조선국왕 수만세(乙亥生 朝鮮國王 壽萬歲)광해군의 난해(乙亥1575년)라고 묵서가 쓰여있으며 안고름에는 을해생 주상전하 수만세(乙亥生 主上殿下 壽萬歲)라고 쓰여있어 국왕의 壽命長壽를 기원했던 것이다.
    중궁 유 氏의 홍색저고리에는 옷 안자락에 병자생 중궁유氏 명의 무병만세신여 금강천령설소만복 영창소원여의심신 안녕성신손계계승승(丙子生 中宮柳氏 命衣 無病萬歲身如 金剛千靈雪消萬福 永昌所願如義心神 安寧聖神孫繼繼承承)(中宮柳氏의 난해 丙子1576년)이라는 축원문이 묵서로 되어있다. 상궁권씨의 자주색 저고리에는 옷 안자락에 권氏 을유생(權氏 乙酉生)1585년 이라고 묵서가 되어있다.
  2. 동진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팔만대장경 판전건물에는 북쪽을 상전인 법보전, 남쪽을 하전인 수다라장이라 한다. 판전건물을 북각판당 165평, 남각판당 165평, 동제판당 17평, 서제판당 17평 보안문 1평, 총365평과 108개의 기둥으로 된 건물로서 국보 52호이다. 수다라장의 서편맨 끝에 보면 책판위에 부처님을 모셔 놓았다. 그냥 지나가면서 보면 보이지 않고 허리를 굽혀 쳐다보면 보인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이 동진보살이다. 해설사 및 다른 분들도 필자에게 가장 많이 전화상 묻는 것이 이 보살상이다. 동진보살은 불경을 관장하는 보살로서 책판에 모시기도 하고 경판의 맨 마지막에 동진보살상을 새겨 놓기도 한다.
    1). 이 보살은 초선천에 있는 범왕으로 보고 있다.
    그 얼굴이 동자를 닮았고, 항상 닭을 받들고 방울을 들었으며 붉은번을 가지고 공작을 타고 있다고 한다. 밀교의 세계를 묘사한 만다라에서 대자재천(대자재천)의 아들이라 하여 태장계 외금 강부에 그린다.
    2).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써 위타천, 위천장군, 위태천신이라고도 한다. 이신은 4천왕 중 남방 중장천왕의 8장군 중 하나로써 32천의 우두머리이기도하다. 당나라 때 율사 도선이 만난 뒤부터 가람에 모시게 되었다.
    3). 속설에는 마군(마귀)이 와서 부처님 사리를 훔쳐간 것을 추적하여 찾아 왔다고도 하는데 있는 “열반경”에서 제석천이 부처님 다비를 하는데 와서 치아 두 개를 주었다가 그 하나를 나찰에게 빼앗겼는데서 기인한다.
    4). 동진보살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의 신중탱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신중탱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삼장탱화 뿐만 아니라 현재 유행하는 신중탱화에서도 중심이 되는 신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여러 유형의 신중탱화 중에서도 이 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상하에 십이지신장과 팔부신장 등의 신장상 만을 묘사하는 탱화가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다.
    5). 탱화에서는 오른손에 칼을 들거나 합장하여 팔뚝에 삼지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닭의 날개모양이 양쪽으로 달려있는 투구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불경을 간행할 때 권두 또는 권말에 동진보살을 판각해서 경전의 수호를 상징하는 경우도 많이 발견되는데, 그 모습도 탱화에서와 거의 비슷하다.
  3. 인파당 스님의 사리탑은 어디에 있는가?
    해인사의 상징적인 암자 “원당암” 즉 해인사에서 가장 먼저 창건되었다는 원당암을 찾아가면 해인사 일주문에서 약 300m쯤 올라가면 오른쪽으로는 홍제암으로, 왼쪽으로는 원당암 가는 길이 나온다. 무생교란 교량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큰 바위가 하나 비스듬히 있는데 이곳이 안파스님의 사리탑 바위다. 이탑 사리에 얽힌 이야기가 승가에서만 전해오고 있다. 인파스님은 1846년 열반한 조선 개화기 스님으로 해인사에서 나신 도인 중 한분으로 존경받는 스님이었다. 인파스님 열반 뒤 다비를 한 제자들이 아무리 뒤져도 기대하던 도인의 사리가 수습되지 않자 실망한 제자들이 스님의 행장을 두고 갑론을박 하고 있을 무렵 다비식이 있었던 마당에 오색 빛 한줄기가 나타나서 그 빛을 따라 내려가니 바로 지금의 자리인 원당암 입구 큰 바위였다. 그 바위 위에 구멍을 뚫고 스승의 사리를 모셨던 것인데 150년이 지난 1990년대 말에 원당암 혜암스님이 “인파당사리탑”이라고 새겨 놓았다.
    《인파스님의 임종계》
    횡추보검 안령대(橫抽寶劍 案靈臺) 비껴찬 보검 뽑아 영대위에 놓으니
    살활기권 수단개(殺活奇權 手端開) 생사의 기이한 방편이 손끝에 열리고
    용장운우 비신변(龍將雲雨 飛神變) 용이 비구름을 이끌고 신이를 일으키니
    풍득허공 임왕래(風得虛空 任往來) 바람은 허공을 얻어 마음대로 다니네.
    인파스님의 사리탑 바로 위에는 대성암 유지가 있는데, 그 유지는 상, 하단 약 200평 정도로 1943년 박대성화신녀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자기의 이름을 따 대성암이라 불렀다. 당시 백련암 윤포산(혜천)스님의 신도로 1954년 음력12월29일 설을 쉴 준비를 하다가 온돌과열로 화재가 나서 다 타고 말았다. 현재는 유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