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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이제는 함께 새판을 짜자 – 여류 이병철 시인

일찍 봄이 열린 남녘에선 꽃들도 먼저 지고 있다. 앞뜰의 매화와 산수유, 수선화도 이미 지고 있고 온 산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도 이제는 거의 다 졌다. 산벚꽃과 함께 피어난 거리의 벚꽃들도 바람에 우수수 그 화사한 꽃잎을 날리고 있다. 먼저 피었으니 먼저 지는 것이다. 새삼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 꽃을 다시 보려면 다시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시 폭염의 여름을 지나야 하고 잎 지는 가을의 쓸쓸함과 혹한의 긴 겨울을 참고 견뎌내어야 새봄의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봄에 피고 지는 꽃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손길을 삼가야 하는 까닭이다.
어제 헌재에 의해서 탄핵이 인용되어 대통령이 파면 되었다. 18대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20대 윤석열 대통령까지 탄핵으로 파면된 것이다. 이로써 이 나라는 짧은 헌정사에 두 명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대통령의 탄핵이란 당사자의 문제를 넘어 이 나라 전체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헌재의 판결에 동의한다. 법리 적용의 편파성 문제가 다소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위헌적인 비상계엄의 폭거를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탄핵 인용을 통한 파면은 사필귀정이고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사태를 눈먼 자의 무지한 소행이라고 비판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 파면되었으니 이제는 대선 체제로 전환되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 이 나라 정치의 가장 당면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서둘러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다고 지금 이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편파적 진영논리에 의한 국론분열과 이로 인한 사실상의 심리적 내란 상태와 다를 바 없는 극단적인 대립상태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탄핵 이후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는 지금 양극단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국민을 어떻게 통합과 화해의 길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 나라는 망국적 상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탄핵으로 대통령이 파면되자 탄핵을 추진했던 세력들은 이제 내란 세력 청산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마치 점령군인 것처럼 밀어붙이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폭거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다수의 국민이 탄핵 반대의 편으로 돌아선 것은 이 사태를 초래한 책임의 한 부분이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과 그 세력들에게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세를 장악한 한 진영과 그 세력이 다른 정치집단이나 세력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거나 배척하는 형태가 앞르로도 계속 이어지는 한 그것은 갈등과 분열의 심화로 한 정치집단의 불행만이 아니라 이 나라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나락으로 내몰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한 세력을 청산하고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그 말이 무섭고 섬뜩하다. 그 말, 그 용어에서 증오와 적개심이 느껴진다. 마치 나치나 크메르루주의 그 광기에 찬 인종청소나 집단적 학살이 떠오른다. 70년대, 반군부독재 투쟁에서나 썼던 그 살벌한 구호들이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대낮에 다시 나부낀다는 사실이 아프고 안타깝다. 탄핵에 반대한 절반에 가까운 국민을 내란 세력으로 물아 청산하겠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어떤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
이제는 정말 함께 살길을 찾아야 한다. 탄핵 찬반 대립은 끝났다. 광장과 거리의 정치를 끝내고 이제부터는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 나서야 한다. 새판, 새로운 정치판을 만들어가야 한다.
두 명의 대통령 탄핵과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을 통해서도 87 헌법 체제의 문제와 한계가 극명히 드러났다. 이번 기회에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와 의회의 입법 독재와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와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직 인사들의 특권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헌정사의 불행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음은 명확하다.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 없이는 지금 국민의 절반이 양 진영으로 서로 갈라져 있는 이런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의 상태를 해소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탄핵 이후의 대선 국면에서의 가장 우선하고 절박한 문제는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과 함께 87 체제의 극복을 위한 개헌과 더불어 협치와 연정(聯政)이 가능할 수 있는 선거제도 등에 대한 개선과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의 과도한 특권을 폐지하는 입법 조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에 특권을 함께 폐지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과 의회는 권력욕에만 사로잡힌 파렴치범들과 양아치들의 소굴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대선 국면을 개헌 정국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야 지금 양극단으로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치유하여 통합과 상생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나라는 기적의 역사로 이루어온 나라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작은 나라가 어떻게 채 백 년도 안 된 기간에 전쟁의 참화를 겪고서도 세계 최빈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며 세계의 앞선 국가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뜨거워진다. 그런데 그렇게 피땀으로 세워온 이 나라가 또다시 망국적인 지난 시대의 망령인 좌우라는 이념과 진영으로 나누어 스스로를 나락으로 내몰고 있는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새봄이 왔다. 눈길이 가닿는 온 사방에 꽃들이 피고 지고 산천은 연초록색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묵정밭을 갈아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할 때이다. 이처럼 이 나라의 정치판도 새롭게 갈아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한다. 나는 이번 대선 국면을 새로운 나라를 위한 개헌 정국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정치판의 묵정밭을 갈아엎고 새 씨앗을 뿌리는 그 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그렇게 새 판을 짤 수가 있다면 지구촌의 재앙과 닥쳐와 있는 세계적인 암울함 속에서도 아직 이 나라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에겐 그런 역사적인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탄핵을 이끈 민주당과 턴핵반대에 앞장 섰던 세력들도 국민 통합과 상생의 새판, 새 나라를 열어가는 길에 앞장서기를 당부드린다. 그러면 이번에 생각을 달리했던 많은 국민도 기꺼이 함께하리라 믿는다. 그래야 정치가 법치에 우선하는 정상적인 국가를 운영할 수가 있다.
바람이 없어도 우수수 꽃잎 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피고 지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모두가 한때이다. 권력 또한 이와 같다.
꽃이 피면 벌 나비가 날아든다. 꽃과 꿀벌의 관계처럼 그렇게 호혜 상생하는 정치체제를 그려본다. 주민자치에 바탕한 협치와 연정의 정치체제를. 이번 탄핵 이후의 국면이 그런 새판을 짜는 시작이 될 수 있기를 간곡히 마음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