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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늦은 봄날 텃밭에서 – 이호석 수필가

을사년 새해 달력을 벽에 건 지 두서너 달 지난 것 같은데 벌써 봄 계절이 끝나는 5월의 마지막 주다. 이른 봄부터 전국 곳곳에서 개나리, 벚나무, 철쭉 등이 화려한 꽃 잔치를 벌이며 떠들썩하더니 이제 막을 내린 것 같다.
우리 집에도 봄꽃들이 지나가고 지금은 텃밭에서 채소들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집 앞 텃밭 가장자리에 있는 자두나무와 앵두나무, 뒤뜰에 있는 살구나무가 지난 4월 초쯤 집 주위를 온통 분홍 꽃으로 장식하더니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날 얕은 눈바람에 꽃들이 움츠리며 부들부들 떨더니만 자두와 앵두꽃은 추위에 얼었는지 열매가 모두 곪아 떨어지고 잎만 무성하다. 뒤뜰 살구꽃은 추위 단속을 잘한 모양이다. 아무런 피해 없이 살구가 잘 자라고 있다. 벌써 작은 탱자만 한 게 입안의 침샘을 건드리며 새콤달콤한 본연의 맛을 기대하게 한다.
마당 옆 30평 남짓한 텃밭에는 이웃에서 모종을 얻어 심은 상치는 벌써 밥상에 오른 지 한참 되었고, 스무날 전쯤 읍내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가지, 방울토마토, 고추, 오이, 땅콩, 호박, 참외 등 채소들이 낯선 밭에 이사를 와서도 사름을 마치고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란다. 좁은 텃밭이 벌써 채소들로 가득한 기분이다. 모두 모양새도 다르고 키와 몸 체형도 다르면서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열심히 자라는 게 대견스럽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텃밭으로 나가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채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하루를 시작한다. 평소에는 건성으로 보던 채소들을 요즈음 품종별로 세밀히 훑어보며 사랑을 더욱 쏟는다. 방울토마토가 가장 빨리 자라고, 가지, 마디 호박, 고추, 오이, 참외, 땅콩 순이다. 사름의 고통을 이겨낸 채소들이 서로 시샘하듯 며칠 전부터 모두 자신 특유의 예쁜 꽃을 피우며 나에게 아양을 떤다.
꽃피는 순서와 꽃의 크기, 모양, 색깔, 꽃잎이 모두 제각각이다. 제일 먼저 피기 시작 한 마디 호박꽃은 누른 황금빛을 띠며 나팔 모양이다. 꽃의 크기도 함께 있는 채소 중 가장 크다. 아침 일찍 피었다가 정오 무렵이면 더위가 싫은지 살며시 꽃잎을 다문다. 그 뒤를 이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토마토, 오이, 가지, 땅콩, 고추가 연달아 꽃을 피운다.
오늘 아침 나는 일찍이 나가 꽃들과 눈인사를 나눈 후 꽃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본다. 방울토마토는 작은 노란 꽃들이 앙증맞게 송이를 이루고 있고 꽃잎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다. 오이꽃도 노랗고 다섯 잎이다. 오이는 벌써 가냘픈 손을 내밀며 뒤쪽에 기대놓은 대나무 가지를 움켜쥐고 끙끙거리며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다. 땅콩꽃도 노랗다. 꽃이 아주 작고 두 개의 떡잎 모양이다. 뿌리채소인 땅콩은 잎 옆에 꽃이 피어 있지만 땅속뿌리에 주렁주렁 달리는 게 다른 채소와 다르다.
고추꽃은 유일하게 하얗고 아주 작다. 꽃잎이 여섯 갈래로 별 모양이다. 어릴 때 길거리 상점에서 흔히 사 먹던 하얀 별 과자를 연상케 한다. 가장 늦게 핀 가지꽃은 짙은 보라색 주머니에서 나온다. 꽃주머니에는 작은 가시가 있어 꽃과 자라는 가지를 보호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꽃 색깔은 순수한 보라색이며 꽃잎은 여섯 갈래이다.
아무 생각 없이 텃밭의 채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스멀스멀 어릴 적 추억이 밀려온다. 그중에도 할머님께서 봄부터 늦여름까지 수시로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땀방울을 흘리며 집 주위의 곳곳에 나 있는 잡초들을 매던 모습이 가장 가까이 떠오른다.
오늘 아침에도 뒷산 골짜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울어대는 울음소리는 가끔 나의 마음을 적적하게 한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정겹게 들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뻐꾸기 울음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이다. 어머니를 따라 마을 뒤 골짜기 밭으로 갈 때였다. 멀리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어머니께서 뻐꾸기 울음소리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애잔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생각한다.
텃밭이 이렇게 탐스러운 채소를 잘 키워주고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해 주면서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 주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초봄부터 놀 골마다 수시로 잡초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나를 여간 힘들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봄, 여름철만 되면 이 불청객들과 싸우느라 고생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생각을 달리했다. 잡초를 친구처럼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수시로 일거리를 만들어 주면서 나를 부지런하게 하였고, 어릴 적의 아름다운 추억까지 소환해 주면서 고맙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텃밭의 잡초를 매면서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이 천지신명의 뜻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잡초도 자기 종족 번식의 사명을 띠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자기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인간들의 그 모진 죽임과 학대에도 눈을 피해 가며 곳곳에서 이렇게 악착스럽게 씨를 뿌리고 돋아나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