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은 흐른다(36) 바위틈에서 키운 하얀 꿈 – 소민호
백련암을 등지고 앉은 작은 연못에 빛을 잃은 연잎들이 둥둥 떠 있었습니다. 다람쥐들도 가을걷이에 연못가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다니는 다람쥐들만 보면 자꾸만 옛날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내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소쿠리 안에서 동무들과 봄을 기다리며 하얀 꿈만 꾸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딱딱한 껍질 때문이었습니다.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마냥 꿈만 키운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백련암 큰스님은 한 번씩 우리를 만져 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 웃음 때문에 나는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깐이었습니다. 다람쥐들이 우리를 노렸던 겁니다.
(중략)
드디어 내 이파리 사이에서 촛불을 닮은 하얀 꽃봉오리가 햇살에 빛났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연못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습니다.
아, 연못 위에는 분홍빛 꽃봉오리들이 동동 떠 있었습니다.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배도 살살 아픈 것 같았습니다.
생긴 모습은 같아도 나만 흰 꽃이니까 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요. 자기들과 조금, 아주 조금만 달라도 놀리는 거 말입니다. 그렇게 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던지!
그때였습니다.
“스님, 저기 흰 연꽃이!”
덕구 스님이었습니다. 말을 잃었던 동자승, 마음으로만 말하던 덕구 스님이 말을 한 겁니다.
“아− 30년 전에 잃었던 백련, 돌아가신 큰스님이 그렇게도 좋아하셨던 그 흰 연꽃이로구나! 이제는 우리 암자 이름을 마음 놓고 불러도 되겠어!”
촉촉이 젖은 듯한 스님의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응? 그러고 보니 너도 잃었던 말을 찾았구나!”
한참 흰 연꽃에 취해 있던 큰스님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덕구 스님을 바라보았습니다.
“…….”
덕구 스님도 까만 눈을 깜박이며 큰스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올해부터는 향 좋은 백련차 맛을 볼 수 있겠구나!”
큰스님은 덕구 스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 옆에 서 있는 소나무도 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더 커진 가지를 흔들며.
손국복 시인의 시평|
백 년이 지나도 씨앗이 단단하여 썩지 않고 끝내 발아한다는 백련.
우리네 삶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참고 견디면 30년 만에 연못 바위틈에서 핀 백련처럼 새로운 세상과 빛, 희망을 만나지 않을까?
이 동화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생명일지라도 자기 정체성을 찾고 본성을 발견해야 된다는 인생 교훈을 던지고 있다.
수많은 동화를 쓰며 한국문단 동화 부문에서 독보적 존재 가치와 인정을 받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민호 아동문학가는 합천 대양 출신으로 어린이 잡지<동화문학>에 1994년 <바보 바위>로 등단 후 부산에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다가 수 년 전 고향으로 귀향하여 전원생활과 창작 활동을 겸하고 있다.
동화집으로 <자맥질><다라국 소년 더기><소민호 동화선집> 등 많은 창작집을 펴내었으며 <어린이 글수레>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부산문학 우수상> <이주홍 아동문학상> 등 많은 수상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아동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길 합천 출신의 훌륭한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