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이 80대 길목에서의 상념(想念) – 이호석 수필가
얼마 전 70대 막바지에서 나이를 더 먹기 싫어 버텨 봤지만, 며칠 전 자연의 섭리라는 무지막지한 세월에 끌려 어쩔 수 없이 전국의 남녀 동갑들과 함께 80대에 들어서고 말았다.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본다. 태어나서 20대 초입까지는 성장과 배움의 세월이었다. 그 후부터 60대 초입까지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인생이 무한한 것으로 착각하며 억척스럽게 살았다. 솔직히 그때는 80대 노인을 보면 살 만큼 사셨던 분들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빨리 80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생산 일선에서 물러난 60대에는 그때만 해도 인생이 제법 많이 남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직장에 얽매여 있던 몸과 마음을 풀며 어영부영 세월을 보냈다. 곧 들이닥친 70대에는 내가 언제, 무엇을 하면서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나 하고 스스로 놀라면서도, 그동안 소홀히 한 건강관리와 취미생활을 하며 즐거운 세월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금방 80대 문턱이 들이닥쳐 세월의 빠름에 또 한 번 놀랐다.
얼마 전부터 주변의 또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띄엄띄엄 저승 가는 것을 보면서 ‘아차!’ 나도 머지않은 세월 언젠가는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면서 마음이 움츠러들기도 했다.
죽음은 인간의 역능이 미치지 않는, 아무도 모르는 공간으로 가는 것이다. 옛 어른들은 죽음을 ‘돌아가신다’고 했다. 지붕에 올라가 삼베옷을 흔들면서 성씨를 붙여 아무개가 ‘돌아가신다’고 큰소리로 고(告)했다. 요즘 죽음은 의사의 “사망했습니다”라는 선언으로 끝난다. ‘돌아가신다’는 말은 왔던 곳으로 귀환한다는 의미가 있다. 육신은 이곳에 있더라도 영혼은 왔던 곳으로 간다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망했습니다”는 숨이 끊어졌다는 표현으로, ‘돌아가셨다’와는 뜻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돌아가신다고 생각할 때와 요즘같이 의사가 사망을 선언하는 죽음에는 장례 의식도 조금 다르다. 돌아가셨다고 할 때는 일관(日官)을 찾아 길일을 잡고, 지관(地官)을 앞세워 좋은 장소를 찾아 장례를 했다. 이때는 마을 어른 모두가 나와 망자를 꽃상여에 태워 보냈으며, 장지에 도착하여 안장될 때까지 함께해 주었다. 반면에 의사의 사망 선언으로 죽음을 확인하는 지금은 대다수가 삼일장으로 끝내고 화장장을 거쳐 바로 납골당으로 모시게 된다.
이승의 아이들 눈은 티 없이 맑고 영롱하다. 이는 세상에 나와 대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청소년의 눈이 청명하고 광채가 나는 것은 무한한 욕구와 꿈과 의욕이 있기 때문이며, 노년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은 호기심을 잃은 탓이다. 즉 모든 사물과 욕망이 무미건조해지는 것이다. 호기심과 의욕은 생과 활동의 근원이다. 인간이 이룬 모든 문명은 그것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호기심과 의욕을 잃는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같다.
벌써 오래전에 고인이 된 친구들도 많다. 그때는 항상 슬픈 마음으로 애도하면서도 남의 일같이 예사롭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 친구들의 죽음 소식이 오면 마치 나의 일 같고 새삼 세월의 빠름과 인생무상을 생각하게 된다.
여섯 달 전, 마을 동갑 친구 한 사람이 저세상으로 가더니 며칠 전 또 인근 마을에서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친구들과 문상을 다녀왔다. 문상을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차츰 줄어든다. 며칠 전까지 건장한 모습으로 함께 놀던 친구가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타계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승과 저승이 종이 한 장 차이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친구의 영정 앞에 섰다. 다시 한번 인생무상을 생각하며 나는 절을 하고, 그 친구는 웃음기 있는 밝은 표정으로 나의 절을 받고 있다. 장례식장에 있는 가족들은 갑자기 닥친 가장(家長)의 죽음에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허겁지겁 문상객들을 맞고 있는데, 영정 속의 사자(死者)는 치열했던 생존경쟁에서 그새 벗어나 마음이 편안해진 모양이다. 홀가분한 얼굴에 옅은 웃음까지 곁들여 있는 모습이다.
근년에 와서 동갑들이 하나둘 저승으로 가는 것을 보면, 마치 신체검사를 마친 친구들이 입영 통지서를 받고 차례차례 가듯이, 팔순을 전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염라대왕의 호출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오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다.
평소에는 생로병사가 영웅호걸도, 백만장자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생각하고 있음에도, 막상 주위에서 같은 또래들이 하나둘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보면 인생무상과 서글픔을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좋을지도 생각해 본다. 먼저 언제일지 모르는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짐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입지도 않으면서 쌓아둔 옷가지며 다 읽지도 못하면서 욕심스럽게 쌓아둔 책들을 조금씩 덜어내어 아쉬운 마음과 함께 마을 앞 쓰레기 집하장에 내다 버린다.
그중에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쌓아둔 많은 책을 내다 버릴 때는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차츰 눈도 침침해지고, 책장을 넘기면 금방 내용을 잊어버리는 노인이 되어가니 어쩌겠는가.
언젠가 죽음을 맞을 때는 선대들의 총명으로 멋지게 지어 놓은 ‘일장춘몽’의 꿈속에서 행복하게 잘 지냈다며, 평안한 마음으로 갈 생각이다. 일부 종교에서 저승에는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지만, 그곳을 다녀온 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 길의 유무(有無)는 각자의 생각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