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해인사 고운 최치원선생 유적 – 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24)

하재효
논설위원

1. 문창후최고운선생신도비명(文昌侯崔孤雲先生神道碑銘) 내용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명현석덕(名賢碩德)이 세대를 이어 배출하였으나,평생의 큰 뜻을 이룩하고 한점의 결함없이 수연광명(粹然光明)한 도덕문학의 원조이시고 천고의 슬기로운 이상적 위인으로 빛내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신라 말엽에 최고운선생이시다.
선생은 신라 헌안왕 원년(단기3190년)에 나셔서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율수현위가 되었으니,신라국소년으로 만리타국에서 이런 영예가 또 있으랴, 현위로 계시는 동안 학문은 더욱 정진하여 지었던 글을 모아 중산복궤집 다섯권을 만드셨다. 몇해뒤 황소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제도행영병마도통을 명하여 난리를 토벌케 하고 선생은 24세로 그의 종사관이 되어 이듬해 황소를 치는 격문을 지었으니, “천하의 모든 사람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밑에 있는 귀신들 까지도 너를 죽이기로 의논했으리” 황소는 이 구절을 보고 저도 모르게 상에서 떨어졌다 한다. 이 글로써 선생의 이름은 천하에 떨쳤고, 곧 이어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으로 승차되는 한편 26세 때에는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으셨으니, 이국청년으로써 대궐을 임의로 드나들 수 있는 지상(至上)의 영광이므로 시를 지어 사의를 전하였다. 28세에 본국으로 돌아오시려고 장계를 올렸더니, 황제는 특히 당의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띠게 해주었으며, 당나라 문사들도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고운(顧雲)은 같이 급제한 친교로써 아래와 같은 시를 써주었다. “계림나라 삼신산 맑은 정기로 태어난 기이한 사람1세 배타고 바다길 건너와 글로써 중앙천지 흔들었고, 18세에 과거마당 들어가 대번에 급제 한장 따낸이라네” 청년 영제로 만리 타국에 명성을 날리시고 금의환향하시어 신라 헌강왕으로부터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의 요직을 받으시고, 한편 당에서 지었던 글들을 엮어 계원필경(桂苑筆耕)이란 이름을 붙이고 시집 3권을 합하여 나라에 올리니,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글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학문과 포부를 가졌기 때문에 시기 질투하는 무리의 방해로 말미암아 가슴에 품었던 이상과 포부는 사라져갔고, 나라를 위한 모든 경륜조차 하나도 실시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귀국한 뒤에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이어 세상을 떠나고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는 나라안의 정세가 더욱 어지러워져 조정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략을 도저히 막아낼 도리가 없어 마침내 선생은 태산군천령군부성군태수가 되어 지방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힘쓰기도 했으나, 선생으로는 쇄망해 가는 국운과 함께 한탄스런 날을 보낸 것이다. 다시 몇해 뒤에 견훤이 따로 나라를 세우니 선생은 비록 나라의 혼란 속에서도 버림받은 사람처럼 되었건마는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진성여왕8년 38세되던 해에 정치의 급선무십조를 써 올리시니 여왕도 칭찬하여 아찬을 내려주시니 진골이외로는 최고의 작위였던 것이다. 그러자 44세때는 궁예가 또 일어나 딴 나라를 세웠으니, 이같이 혼란하야 학문이 쓸곳 없고 인심조차 갈수록 험악하므로 마침내 벼슬을 던져버리고 경주의 금오산과 합천의 청량사와 해인사 의성의 빙산과 지리산의 쌍계사 동래 해운대 마산 월영대 양산 임경대 함양의 학사루 옥구의 자천대가 모두 발자욱이 끼친 곳이요 해인사에 수식하신 한그루는 천년전 옛 정곡(情曲)을 생생히 말해주는 듯하다. 고려 현종때에 선생을 문묘에 종사케 하고 문창후의 시호를 내리시니 유학의 최고봉이요 문학의 시조라 존경하여 한 것이리라. 선생의 난랑비 서문은 화랑의 내용을 알려준 보배로운 기록이요, 진감선사 백월화상 지증대사의 비문 및 화엄경 결사문등 명문들은 그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말년에 처자를 이끌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으시고 여년을 보내셨다. 선생은 우리나라 문학의 원조요, 시격(詩格)의 최고봉을 점령한 대문호요,세상을 초월한 성현이시다. 끼치심 많은 작품중에 몇 편을 소개해 본다.

寓興 ; 생각을 붙여
너 부터 이익길엔 생각끊고 부모주신 귀한 몸 상치 말아라 어찌다 진주를 캐는 저 사람 목숨 걸고 바다밑을 들어가는고 몸의 영화 티끌에 더럽기 쉽고 마음 때는 씻기 어렵내 누구와 담담한 맛 의논하리요 사람들은 달고 취함 즐기는 것을

가야산홍류동
미친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 지측에서 하는 말도 분간못하네
행여나 세상시비 귀에 들릴까 / 흐르는 물시켜 산을 감쌌네

모두가 혼연천성으로 과연 시성이 아니면 얻지 못할 문장이다. 선생의 후손 돈식이 말하기를 가야산은 선생께서 만년에 이식수도한 곳이요, 점필제 김종직 선생의 말씀과 서유구 선생의 계원필경서문에 선생의 묘소가 가야산록 홍류동 홍산에 계시다 하였으니, 산천초목도 정체에 젖었던 곳인 바 천년 푸우에 높으신 자취가 점점 인멸되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지방 사림선배들과 종친간에 동의순모하여 구일의 유광을 새롭히려한다. 그 가신 선생의 뜻을 이어받고 앞으로 후손들을 일깨우는 지성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리라. 아 ~ 선생의 고상하신 정신과 거룩하신 문학, 초탈하신 이상은 저 중천에 뜬 밝은 달과 같아서 천산만하에 비치지않는 곳이 없고, 땅속에 유통하는 물같아서 어느 곳에나 파기만하면 솟아 오르는 듯하여 역사가 바뀌고 세태가 변한 오늘에도 선생의 선풍도골의 우유초월하시던 위표를 상상하면 이 겨레의 가슴가슴에 황홀한 흠모감을 아로새겨 수놓아진다. 가야산 솔바람이 천추에 변치않고 홍류동 맑은 물이 만고에 멎지 않을 진데 선생의 높으신 풍도는 우주와 더불어 길이 빛나리라.

단기 4305년 임자 원월 일 후학 김종오 삼가 지음, 후학 김헌태 삼가 씀, (이 비는 가야면 구원1구 홍류동에 위치하며,유허비는 내용이 비슷하여 소개치 않음)
*참고 자료 ; 가야산 해인사지(이지관 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