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할미꽃 단상 – 문경자 논설위원
동네 삽살개도 따듯한 햇살아래 낮잠을 잔다. 허리를 동그랗게 만들어 자는 모양이 귀엽다. 사랑채 마구간 누런 황소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마당 한쪽에 심어 놓은 난초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다가 퍼렇게 질렸다. 할머니가 널어놓은 호박 오가리에도 햇살이 살살 기어 다닌다. 고향의 봄은 이렇게 가벼운 걸음을 한다. 섬돌 위에 벗어놓은 할머니 흰 고무신 코에 봄이 머문다. 할머니의 쪽진 하얀 머리는 무덤가에 피어나는 할미꽃을 닮았다. 할머니는 허리를 펴고 봄볕이 내려앉은 마당을 바라본다.
지금은 할머니가 바라보던 마당도 시멘트로 변하고 봄이 되어도 풀 한 포기 구경하기 어렵다. 봄이 되면 시골의 야산이나 논둑길에 피어나던 할미꽃도 예쁘지만 무덤가에 피어나는 할미꽃이 더 애처롭다. 패랭이꽃, 제비꽃도 피지만 할미꽃은 더 친근감을 준다. 집에서 부르는 할머니란 단어가 익숙해서다.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흔한 꽃.
사람들은 봄에 피어나는 화려하고 향기 나는 꽃을 좋아한다. 매화나 벚꽃, 동백, 장미, 개나리, 진달래가 봄꽃 잔치에 이름이 오른다. 작은 할미꽃은 앉으나 서나 별반 차이가 없을뿐더러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닮은 키작은 할미꽃을 더 좋아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미꽃을 보면 우리 어머니가 슬픔에 잠겨서 고개 숙인 채 울고 있는 모습도 떠오른다. 나도 나이가 들면 등이 굽은 할미꽃처럼 살아가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괜스레 마음이 찡하고 슬픔이 내 몸을 휘감는다.
토종인 할미꽃은 이른 봄에 하얀 꽃대를 올리고 3월 중순부터 꽃봉오리를 볼록하게 내민다. 작은 꽃봉오리는 만지면 툭 하고 필 것 같다. 꽃자루 끝에 한 송이의 적자색 꽃이 아래를 향해 핀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엇을 볼 수가 있을까. 땅에 기어 다니는 개미는 그 꽃 아래서 놀고 친구가 되어줄는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그렇게 평생을 땅만 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따사로운 햇살에 피어난 할미꽃은 봄바람이 간지러운지 얼굴이 붉다. 슬픈 추억이라는 꽃말을 가진 할미꽃. 할미꽃을 보면 내 어릴 적 생각이 되살아나곤 한다.
슬픔이 묻어있는 할미꽃. 단발머리 친구들과 봄나물을 캐기 위해 잔설이 남은 길을 따라 간다. 개울가에 있는 버들강아지도 긴 잠에서 깨어나 보송보송한 솜털을 자랑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더 좋았다. 나물도 나물이지만 동산에 올라 잔디밭에서 놀이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양지바른 무덤가에는 햇볕이 따사롭게 놀고 있었다. 누렇게 변한 잔디도 약간의 푸른빛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잔디를 쓰다듬어 보니 찬기가 돌았다.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땅속에서 잠을 자나 보다. 옆에는 소나무가 푸르고 아늑한 분위기는 안방 같았다. 우리들의 재잘거림은 산새들 노래 같다. 무덤이 있는 곳은 햇볕이 따듯하고 폭신한 잔디가 있어 할머니 품속같이 포근하였다. 모질게 춥던 겨울도 견디고 세상구경 나온 할미꽃은 우리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반겨주는 할미꽃이 있어 더 즐거웠다.
나에게 유난히 정을 주었던 할머니가 보고 싶다. 무덤이 멀어서 찾아가기는 어렵지만 맘은 항상 할머니 생각이다. 여기에 피어있는 할미꽃은 우리 조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중하게 절을 했다. 혹시 우리 할머니 넋이 아닌가 혼자 중얼거렸다. ‘할머니 겨울에 많이 춥지예’ 하고 말하였다. 개구쟁이들은 무덤가에 왔으니 상여놀이 하자고 했다. 우리는 두 손을 모으고 동시에 ‘아이고 우리 오메 인제가면 언제오노 아이고 흑흑’ 하는데 까마귀도 슬피 울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웃음 반 울음 반 소리가 멀리 흩어졌다. 우리는 고개 숙인 할미꽃에게 큰 절을 올렸다. 무덤가에는 슬픔도 사라지고 아지랑이 같은 웃음이 묻었다.
서로 마주보며 무덤가 잔디에 누웠다. 봄빛이 푸른 하늘에 그림을 그렸는지 들꽃들이 활짝 피었다. 하늘은 너무도 맑고 깨끗했다. 흰 구름은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며 둥둥 떠간다. 우리도 같이 떠가는 기분이 들었다. 누워서 보는 할미꽃은 색다르게 보였다. 노란색 꽃술에 적자주색 벨벳으로 치장을 한 멋쟁이 할머니로 보였다. 하얀 나비, 노랑 나비 날아와 살포시 입맞춤하고 날아갔다. 할미꽃은 생기를 찾고 자태도 고왔다. 할미꽃은 허리가 얼마나 아플까!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미꽃 허리를 펴주었다. 아이구 고마워라 이렇게 허리를 쭉 펴주니 온 세상이 참 밝고 좋구나 하는 무언의 소리가 먼 산 너머로 퍼져갔다.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출출한 배가 바람 빠진 하얀 풍선처럼 되었다. 어머니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저절로 할미꽃같이 허리가 굽고 머리가 숙여졌다. 무덤가에 피어있는 할미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