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학술대회 – 송상용 향토사학자
지난 6월 13일(목) 합천박물관 대강당에서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란 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우리 합천군에서 주관했고 대회를 알리는 현수막까지 설치되었다, 나를 비롯한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나 박물관이 소재한 쌍책, 적중, 청덕, 율곡, 초계면 외 많은 읍·면민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창원대학교의 박물관 구산우 관장의 사회로 네 분의 주체 발표자와 네 분의 종합토론자가 참석했는데, 당초 주제발표자로 참여하기로 되어있던 순천향대학교 노승석 전 교수는 참석하지 않고, 대신 경상대학교 강신웅 명예교수가 <합천지역의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도원수부 위치>라는 주제 발표를 하였다. 이 학술발표에서 황당한 광경들을 보고 우리 군민들께서 한번 쯤 생각하고 눈여겨보았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 이 글을 쓴다.
당초 학술대회를 마련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여론도 있는가 하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항을 몇 사람이 항의 한다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제쳐두고 진행을 맡은 창원대학 구산우 관장의 종합토론 진행이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본 학술대회의 제1, 제2 주제발표는 큰 의미가 없고 제3주제 발표자인 강신웅 경상대학 교수의 <합천지역의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도원수부 위치>가 학술대회 하이라이트였고, 종합토론의 강용수 창원대학 명예교수의 토론이 가장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종합토론 시간에 좌장 격인 구산우 교수가 주제 발표를 한 강신우 교수를 행사(토론) 시작 전 어느 누구에게도 양해를 구함도 없이 토론 중 내보내고 토론자인 강용수 교수의 토론 문 발표를 방해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으니 기대를 모우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청중(관중)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강신웅 교수의 학술 발표는 그 내용이 부실하고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전체 초빙교수의 토론이 마치면 강신웅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해 질의하고 토론할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학술대회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학술회장을 빠져나가 급기야 관중석에서 주제발표자 깅신웅 교수의 도망(?)을 질타하고 붙잡아야 한다는 항의가 나왔다. 그래서 참석자들은 이 강의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내용에 대한 지적과 토론의 기회를 잃고야 말았다. 이런 강의자의 강의만으로 끝난 학술대회로서의 별다른 의미가 없다. 더욱이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평소에 우리 합천의 향토역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그 나름대로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강신웅 명예교수와 주제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토론을 하고 싶었다.
사회자인 좌장격인 구 교수는 토론자의 토론 발표도 미룬 채 엉뚱한 관계자 이강중씨와 주고받는 대화로 대회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과정에서 질문은 토론자 발표가 끝난 후에 정식 질의를 하도록 계속 진행을 요구하는 해프닝까지 발생했다.
우리는 강용수 교수의 발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합천 대양면 아천 출신이라 현장을 누구보다 잘 숙지하고 있을 것이며, 그의 연구논문은 합천군민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회자로부터 제재를 받아 내용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대회는 끝났지만 강용수 교수의 연구 내용은 우리를 놀라게 한 부분이 있다. 자리에 함께 했던 대회 참석자(관중)들 또한 상식에 맞지 않는 진행에 관심을 잃고 많은 사람들이 일찍 자리를 떠나버렸으니, 이런 학술대회는 내 70여 평생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모습이라, 크게 실망한 상태로 집에 와서 학슬대회 책자를 꼼꼼히 읽어 보고 깜짝 놀랄만한 자료를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니 정독 해주시길 바란다.
본 학술대회 책자 p141~ 142을 보면,
1597(정유년)6월 초4일(개해) 흐리다 맑음.
일찍 떠나려는데 현감(신효업)이 문안장과 함께 노자까지 보내왔다. 낮에는 합천 땅에 이르러, 합천에서 10리쯤 떨어진 괴목정이 있는 곳에서 아침밥을 먹고, 너무 덥기 때문에 한동안 말을 쉬고, 5리쯤 되는 앞에 이르니 갈림길이 있는데, 한 길은 바로 합천(陜川)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한 길은 초계(草溪)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갔다. 10리 남짓해서 원수(元帥)의 진이 바라보였다. 문보가 우거하는 집에 잤다. 「고개길(8)을 타고 오는데 기괴한 바위가 천 길이나 되고, 굽이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며, 길은 험하고 위태로워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의 군사라도 지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가 毛汝谷(모여곡)(9)이다.
(8)고갯길을 타고 왔다는 것은 산을 넘었다는 말이며, 굽이도는 강물이란 지도상에서 문림리 밖에 없다. 영전교 삼거리를 지나면 수평이 강물만 보일 뿐이다 즉, 문림리 지역 근처의 고갯길에서 바라본 전경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9) 변용규(흔적)2008 p44-75참조 모여곡(毛汝谷)은 글자의 뜻 그대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지형이 여자 음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모여곡(毛汝谷)이고, 초계지방에서는 여근곡(女根谷), 또는 주변 주민들은 여곡(汝谷) 현 초계 향교지역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지명은 현재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지명은 80% 이상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마을 이름이 작명되었다고 한다.(변용규 흔적p82)>
그러나 6월 4일자 일기 끝부분의 두 줄로 된 작은 글씨를 본문과 똑 같은 글씨체로 보고 해석 할 때는 개비리 또는 그 부근이 모여곡이 된다. 그러니 이 곳은 초계군이 아니고 당시의 행정구역은 합천군 천곡면 지역이다.
《난중일기》를 보면서 직접 답사한 이은상 선생이 저술한 《충무공 발자국 따라, 태양이 비치는 길로》 (下)(삼중당 1973. p264~265)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충무공은 초계의 개벼루를 지나가며, 공의 일기에 이같이 적었다.

만일 이 길이 험한 곳을 지키기만 한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 어려우리라’(정유년 6월 4일 일기)
충무공이 원수진 가까이 ‘모여곡(毛汝谷)’이란 마을에 거처를 정했고 또 마침 그 집이 과부집이라 과부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공의 일기에 적었는데(6월 6일), 나는 10여 년 전에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가며 모여곡(毛汝谷)이 지금의 어딘지를 찾아보려 했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어 그냥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또 지난 신문지상에 이 글을 연재하며 개벼루를 거쳐 옛날 낙민정(樂民亭)이 있던 낙민리 지나 매야동(梅也洞)에 이르러 마을 사람들에게서, 강 건너에는 둔전동(屯田洞)이 옛날의 진터요, 그 곁에 있는 항곡리(項谷里)가 모여곡일 것이라고 하는 말을 그대로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착오된 지적이었던 것이니, 강 건너란 것은 陜川(합천)땅이요, 草溪(초계)고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아 새로 조사해 보았다. 공의 일기에 ‘…낮에 합천 땅에 이르니 고을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괴목정(槐木亭)이 있다’(정유 6월 4일) 했는데, 그것은 지금의 덕정리(德亭里)가 틀림이 없다. 공은 계속해서 ‘그의 일기에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니 갈림길이 있는데, 하나는 합천 고을로 들어가는 길이요. 하나는 초계 가는 길이라,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한 십리쯤 가니 元帥陣(원수진)이 바라보인다’고 했는데, 그것을 현재의 지명에서 상고 해보면, 개벼루를 지나 낙민리를 거쳐 바른편으로 박골(博谷)제를 넘어 택리(宅里)에 오면 초계 쪽으로 관평리(官坪里)에 옛날 원수진이 있었던 곳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이 숙소를 정했다는 모여곡이라는 것도 지금은 그런 이름을 전혀 상고할 길이 없으니, 원수진과의 거리와 실지 정형으로 보아 박곡 근처로 추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뒷날 다른 이의 좀 더 정확한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위의 내용은 이은상 선생의 1973년에 발표한 마지막 연구 글이었다. 이것을 읽었다면 경남대학 사학 팀이나 이 모씨가 추천한 여러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고, 이번의 학술대회로 주관자인 합천군청과 진행을 맡은 사람들은 많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 혈세로 만들어진 아까운 군비를 쓰는 학술대회가 이처럼 부실하다면 어느 누군들 비웃지 않겠는가?
합천군청의 학술용역 행정이 매끄럽지 못함을 우리 군민은 눈여겨 볼 텐데, 역사를 사유물로 삼으려는 올바르지 못한 생각과 장난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 군민의 마음을 얼마나 크게 상처 나도록 했는지.
끝으로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순신 연구소(순천향 대학)’에서 발간한 이순신 연구논총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 중에 아직 이은상 선생을 능가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면 어린 신진 학자들의 눈멀고, 미숙한 연구 발표는 앞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매실은 이은상 선생께서 모여곡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려져 있는데, 이제 합천군청에서는 여태까지 오류를 범하고 군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던 율곡 매실의 이순신 거처지를 하루빨리 철회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