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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임분이 만난 사람(2)| 시인 박태일, “합천을 고향으로 섬기고 싶은 이가 많게 가꾸어 가자”

합천군 율곡면 문림마을 출신 박태일 시인을 두 번째 인터뷰이로 모셨다. 인터뷰는 인터뷰이 요청에 따라 이메일인터뷰로 대신했다. -임임분 기자

지난 8월 31일(토) 이주홍어린이문학관 입주작가들 합평회에 초대된 박태일 시인(동상 왼쪽 모자 쓴 이)

자기소개를 해 달라.
1954년 생으로 율곡면 문림에서 태어났다. 문림분교를 2학년까지 마치고 1963년에 합천을 떠났으니 일찍 고향을 벗어난 셈이다. 아버지께서는 석(碩)자 중(重)자를 쓰셨다. 합천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시다 부산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 합천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 부산에 내려 바라본 도시의 층층집 풍광은 어린 저에게 꽤나 큰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었다. 아마 그게 제가 도시를 향해 지니고 있는 감각의 원형이지 싶다. 1960년대 우리 사회가 보여 주었던 이촌향도의 전형은 아니었지만, 그 큰 흐름을 저희 가족도 탄 셈이다. 그 뒤로 합천은 방학이나 집안 대소사가 있으면 오갈 수 있는 고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점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자주 들릴 수는 없지만, 늘 마음이 가 닿아 있는 곳.
문학을 생업으로 살아오고 있다. 공부도 그쪽으로 해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까지 거쳤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해 문학사회에 얼굴을 낸 뒤, 지금까지 시쓰기와 문학 가르치기를 본문으로 삼아왔다. 잠시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지냈으나, 1985년부터 대학으로 옮겨 지금까지 교수로 일해 왔다. 재직교인 경남대학교에는 1988년부터 머물렀다. 올해로 서른두 해째가 되는군요. 그동안 시집 6권을 비롯해, 문학 연구서, 비평서, 산문집, 편저를 30권 정도 냈고, 논문은 150편 남짓 발표했다. 일찍부터 글쓰기에 뜻을 두었고 그 일로 살고 있으니, 이룬 바는 적다해도 다행스러운 경우라 생각하면서 늘 직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현재 문림 집은 작은어머니가 지키고 계시는데,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다. 가족은 아내와 아래에 출가한 아들 딸 1남 1녀를 두었고, 손자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영락없는 할아버지 세대다.

대학에서 학생 가르치고 연구하고 시를 쓰고 있다. 요즘 관심 가는 연구 주제나 학생들과 나눈 얘기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학자로서 저는 우리 근대문학을 대상으로 지역문학 연구를 핵심 방법론으로 세우고 그 실질을 보이는 글을 꾸준히 써 왔다. 처음에는 경남부산 지역문학을 다루다 경북대구로, 제주도로, 전라광주로, 충청대전으로 점점 범위를 넓혀 왔다. 거기다 2010년대부터는 북한문학으로까지 나아가 한국 지역문학의 밑자리를 더 넓혀 나가는 공부와 그 성과를 보고하고 있다.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연구 의제는 북한 문학예술사 가운데서도 월북한 경남부산 미술인의 재북 시기 활동을 정리하는 일이다. 북한 지역에 관한 한은 문학에서 예술까지 범위를 넓힌 셈이다.
대학에서 제가 맡은 강좌는 주로 현대문학사론이나 비평, 창작론이다. 강좌마다 얼개는 다르지만 강조점은 한 가지로 모인다. 시적으로 살고 생각하자. 시적인 것은 창의적인 것이다. 창의적으로 삶을 내다보고 창의적으로 글을 쓰자는 명제가 그것이다. 오늘날 견디기 힘든 규모에다 너무나 빠른 속도 감각으로 달려오는 욕망의 고속도로는 자칫 자신을 잃어버린 채 5년, 10년, 길지 않은 우리의 삶을 쉽게 소모시키게 만든다. 거기서 버텨내기 위한 최소한의 덕목이 창의성 위에서 마련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강의 시간에도 그런 점을 강조하는 쪽이다.

몇 년 전 경남지역문학을 세세히 다른 연구자료, 시집 등이 한 번에 여러 권 발간되었다. 이후 시집 등 발간 계획이 있는가?
시집 발간은 아직 계획이 없고, 연구서가 곧 나올 예정이다. <한국 지역문학 연구>라는 이름이 될 터인데, 분량으로는 아마 당분간 나오기 힘들 정도의 두툼한 것이 될 예정이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근대문학을 지역문학 쪽으로 파서 한 권에 묶으려다 보니 경남부산을 벗어나 충청대전을 거쳐 경기인천, 강원도 지역까지 나아가고 거기다 재외 지역문학, 곧 나라잃은시대 동경 지역 한글문학과 중국 연변 동포문학까지 범위에 넣다보니 그리 되었다. 그 뒤로는 북한과 경북대구 지역문학을 다룬 연구서가 이어질 예정이다. 아직 계획에는 없으나 아마 다음 시집은 중국 연변 땅을 배경으로 한 것이 되겠다. 머지않은 시일 안에 선뵐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난 여름 중국 연길에 다녀오셨다. 어떤 연수였는가?
지난 2015년 연구년을 한 해 동안 중국 연변동포자치주를 오가며 지냈다. 북한과 연변 동포문학을 범위로 삼은 사료 수집과 연구 활동을 위한 일이었다. 그 뒤부터 여름방학마다 한 달 정도 연길에 머물며 그 일을 계속해 왔다. 지난 여름 연길행도 그와 맞물려 있습니다. 다만 다른 해에는 연구 활동이 중심이어서 여행할 일이 드물었다. 올해 여름에는 다행히 짬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봄 <합천신문>의 기사를 보고 알게 된, 안도현 신촌 곧 연변의 합천 마을로 알려진 곳을 두 차례 다녀왔다. 1938년 합천, 밀양, 거창 분들이 중심이 되어 자리를 잡았던 마을의 내림과 거기 사시는 분들의 오늘을 엿보면서 감개 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준비하고 있는 연변 지역 배경의 시집에서 무거운 자리를 차지할 작품의 초고를 얻기도 했다. 나라가 먹이고 입혀 주지 않아 대대로 내려왔던 삶터를 버리고 삭풍 부는 만주 들에 내던져진 분들, 지금은 고향 마을 이름도 친인척 가계도도 가물가물 다 잊어버린 분들에 그 후손들이 머무는 마을이다. 저에게는 만주 지역을 새롭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합천 지역과 교류가 여러 방면에서 더 잦아지면 좋겠다.

최근 향파이주홍선생기념사업회 입주작가 작품 합평회에 초대되어 합천에 다녀갔다. 지역문화 활성화 측면에서, 지역에서 문학을 하는 이들(향파이주홍선생기념사업회, 합천문협 등), 문화 활동에 관심 있는 이들, 관계 기관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모처럼 문학 행사와 관련하여 고향을 찾게 되었다. 마침 집안 벌초와 겹쳐서 아침나절은 일하고 한낮에 잠시 이주홍어린이문학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상 작가 네 분 모두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고, 운영진들이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쓴다는 점을 느꼈다. 합천 지역 예술문화 활동과 관련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어 드릴 말씀은 없다. 다만 말씀을 주셨으니 두 가지 원론적인 점만을 짚도록 하겠다. 첫째, 민간의 역량만으로는 지역의 예술문화 영역을 이끌어갈 수가 없다. 관과 공공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다만 그 경우 행정 주체에서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늘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칫하면 예술문화 주체들의 활동과 역량을 손쉽게 자신들의 관리 아래 두고 싶은 욕심을 벗기 힘들다. 둘째, 지역 예술문화 종사자들은 어려움이 많겠지만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더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활동을 겨냥하시면 좋겠다. 쉽게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자리를 되풀이하는 데 버릇 들거나 틀에 박혀 버리면 새로움이나 역동성이 깃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지역 예술문화의 수혜자는 당장 눈앞에서 그 행사를 주관하는 예술문화인들이나 지역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즐기고 보고 느끼고 본을 보고 앞날을 꿈꿀 지역의 뒤 세대거나 그 지역을 아끼고 알뜰하게 여길 지역 바깥사람들이다. 나아가 지역 자체의 지역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양질의 예술문화 활동 공간과 이벤트를 마련하고 새로운 지역성을 계발하기 위해 지역 예술문화 종사자들은 늘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경험을 뿌리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합천은 ‘소멸위기’와 ‘개발만능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외지에서 합천을 생각할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는가?
사람이 줄었다고 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 마찬가지로 개발한다고 해서 돈이 모이고 사람이 들어오는 것 또한 아니다. 무엇보다 그 땅과 환경이 더불어 사람 살 만한 곳인가 아닌가라는 근본 물음에서부터 늘 긍정적이지 않을 때 그 땅과 거기서 살고 있는 이들은 오늘과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땅을 건강하게 만들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이 안정적이면서도 포근한 장소감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각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겠다. 그런 점에서 합천 지역의 바람직한 정체성, 미래 가치를 향한 정치, 행정, 문화, 교육 행위가 어떠해야할 것인가를 논하는 담론의 장이 늘 열려 있어야 하고,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작은 독 안에서 멈춘 물처럼 흔들리지 않는 편한 상태를 안정이고 발전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4, 5년의 단기적인 이해득실이나 파당적 이익 배분의 대상으로 지역사회 유무형의 자산과 경관, 정보가 오용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는 눈길이나 기구가 상존해야 하겠다. 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수준에서 합천의 장소적 정체성을 창발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논의에 지혜가 쌓이기를 바란다.
합천 지역은 오랜 세월 떠나는 이들을 더 많이 만들어냈던 곳이다. 나라잃은시대에는 일찍부터 왜나라로 만주로 어느 지역보다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고, 압축적 근대 산업화 물결 속에서도 그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원폭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 가뭄과 큰물로 눈물과 한숨이 끊이지 않았던 시골이었다. 지난 세월 대구로 신의주로 끌려가듯이 떠났을 연변의 신촌 마을 분들의 고초는 어떠했을까. 언 땅을 팔 기력도 없이 내던져 놓다시피 했을 그들의 무덤은 이미 남의 나라에서 풀섶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그 분들이 겪었던 슬픔과 비통을 다음 세대들이 다시 겪도록 만들 수는 없다. 합천 지역이 떠나보내는 곳이 아니라 오고 싶은 곳, 오래 머물러 고향으로 섬기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는 땅으로 가꾸어야하겠다.
저 같은 사람은 직접적인 기여를 하기는 어려우나, 제 직분에 따라 글쓰기 방식으로 합천 잘되는 길에 이바지하는 방안을 늘 생각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 네 번째 시집을 냈을 때 거기에 황강 연작시를 스무 편 넘게 실었다. 그때 이름 높은 모 비평가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저를 나무랐다. 왜 더 큰 낙동강, 유장한 낙동강으로 나오지 않고 황강으로 기어드는 꼴이냐고. 그런데 저에게 구체적인 강의 현실은 낙동강이 아니라 황강이다. 황강이야말로, 먼 위쪽 황지에서 비롯한다고 알려진 낙동강의 곁가지가 아니라 그 본류며 원류라고 생각하고 살아오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실을 마산에서 나서 평생을 서울에서 보낸 그 비평가가 알아채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지에서 살고 있는 합천 문학인으로서 저에게 주어진 한 과업이 황강 쓰기, 낙동강 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가위 연휴가 곧 시작된다. 합천군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집집마다 마을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더 너그럽고 더 넉넉한 한가위 보내시길 빈다. 보기에 따라서 합천은 섬이기도 하면서 든든한 항구다. 합천 지역과 합천 분들이 행복스러우면, 직접적인 이해관계 없이도 함께 행복해 하고 즐거워할 사람들이 합천 바깥, 나라 바깥, 물 건너 곳곳에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