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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일흔이 넘은 내 인생을 돌아보며 – 이호석 논설위원

내 나이 언제,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싶다. 아직도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말이다. 가끔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도, 항상 뭔가 못다 한 일이 있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들면서,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자기의 비명(碑銘)에 남겼다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 같고, 언젠가는 그런 후회를 반드시 할 것 같다.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십 대에는 희망과 절망감이 가득했던 방황의 시기였다.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에서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기대 속에, 새로운 세상을 조금씩 알아 갔다. 그러나 이 기간은 항상 부모님(특히 호랑이 같았던 아버지)의 엄한 통제를 받던 시기로, 내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마냥 그리운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매우 어려웠고, 농촌의 대다수는 보릿고개의 어려움 속에 초근목피로 살다시피 했다. 특히, 우리 집은 삼대(三代) 열 식구가 넘는 대가족에, 6·25동란의 상흔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는 칠 남매의 셋째로 태어나면서 지지리도 불우한 운명을 타고났다. 위로는 맏이인 형님과 바로 위 누님이 있다. 당시는 맏이에 대한 기대와 예우(?)가 매우 클 때라 형님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얼마 안 되는 논뙈기를 팔아가며 고등학교를 시켰지만, 누님과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를 먹이며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 몇 년 후, 오리 길 떨어진 합천읍 소재지에 설립된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정에 의해 중퇴하였다. 이 시절 가장 부러웠던 것은 또래들이 반듯한 교복을 입고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모습이었고, 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러웠다.
이십 대에는 내 인생의 진로가 서서히 변하여 정착되는 시기였다. 이십 대 초에 농사일이 하기 싫어 육군부사관에 자원입대 했다. 논산훈련소와 육군부사관학교를 수료하고 경북 영천에 있던 육군부관학교와 서울 근교의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5년 조금 넘게 군 복무를 했다. 두 곳 모두 군 행정을 교육하는 곳으로 생활하기가 대체로 수월하였고, 언제든지 공부도 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중·고등과정 공부를 두서없이 하였고, 중사로 진급한 후 2년 동안은 영외거주를 하며 학원도 다닐 수 있었다.
1972년 말, 26세에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했다. 이듬해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고향인 합천에서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나는 항상 남보다 배우지 못한 것을 의식하여 매사에 남다른 창의적 사고로 배가(倍加)의 노력을 하여 공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
삼·사·오십 대에는 공직생활로 대체로 평탄한 기간이었다. 아이들도 모두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여 큰아들이 중 2년 때, 초등학생 동생들과 함께 대구로 전학시켰다. 당시는 부모의 주소지와 관계없이 전학이 가능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던 어머님이 아이들과 함께 대구로 나가 뒷바라지를 했다. 이때는 대체로 생활이 안정된 시기였지만, 내 인생에서 큰 불행한 사건 하나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초부터 너무나 다른 사고(思考)로 충돌이 잦았다. 어른들이 이웃에 함께 사는 동안은 서로가 참고 견뎠으나 내 나이 50대 중반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신 후부터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충돌이 더욱 심해지면서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었다. 이혼 후에도 아들 삼 형제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나도 아이들이 바르게 커가도록 전력을 다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아들 셋은 모두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각자 희망하던 직장에 취업하여 열심히 일하며 잘살고 있다.
나는 공직을 퇴직한 후에도 지역의 어느 중소기업에서 관리자로, 또 합천군노인회 사무국장으로 직장생활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합천문화원과 향토사학회, 지역 언론사, 합천이씨 문중 등 지역사회의 주요 사회단체에서 중책을 맡아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새로운 배움이 있고, 작은 보람과 성취감이 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60대 중반에 취미생활로 인연을 맺은 수필 쓰기 공부와 적당한 건강관리(운동)로 활력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백세가 다 된 어느 노(老) 교수가 ‘인생을 살아보니 일과 자녀들의 짐에서 벗어난 65세부터 75세까지가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시절이라’고 말했듯이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하며 즐겁게 살고 있다. 그리고 지난날의 내 인생을 돌아보는 여유도 가진다. 나에게 항상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도, 항상 불행한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인생이 바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연속임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친구와 마을 앞 공원으로 운동을 나간다. 푸른 5월의 공원은 갖가지 이름 모를 꽃들을 물물이 피우면서 우리를 즐겁게 맞이한다. 요즈음은 강변으로 쭈욱 뻗은 자전거 길 양옆으로 ‘금계국’ 노란 꽃이 만발하여 너무나 아름답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얼마 전 어느 TV에서 방영한 드라마 ‘꽃길만 걸어요’ 의 제목이 떠오른다. 인생의 꽃길은 과연 무엇일까? 모두의 소망인 풍족함일까. 아니다. 너무 풍족함에서 오는 불행도 많이 보았다. 건강한 몸으로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가 해결되면 현실에 만족하며 건전하게 사는 게 ‘인생의 꽃길’이 아닐까 싶다.
여생이 항상 지금만 같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또 언젠가 닥쳐올 인생의 마지막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