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삼가 ‘용암서원 묘정비’는 경상우도의 슬픈 자화상이다 (1) – 조찬용 남명선생선양회장
내가 최초로 인터넷에 올리는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명(龍巖書院 廟庭碑銘)’이다.
독일의 역사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말했다.
“과거의 무수한 희생자들을 지금 기억해 내어 구원(Erlösung)하지 않으면, 역사의 진보도 미래도 없다. 우리가 패배 당한 희생자들의 고통과 비탄을 복구(tikkun)하고, 그 세대가 투쟁 대상으로 삼았으나 이루지 못했던 그들의 목표를 완수할 필요가 있다… 파시즘이 득세할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는 진보 이데올로기에 고취된 자들이 파시즘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歷史)는 역사가 아니다. 집요한 기억·기록만이 진보(進步)하는 것 아니겠나.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는 서인(노론)들의 전승비 같은 기념물(조형물)이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남명로(외토리) 72-1 용암서원 마당에 있다. 경남도문화재자료 제 302호다. 묘정비(廟庭碑) 비문은, 노론계열인 진주 대곡 단목리의 하증(河憕) 손자 하명(河洺, 1630~1677)이 당시 노론(서인)의 종주(宗主)인 좌의정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부탁하여 1673년(현종14)에 글, 즉 ‘남명 선생 신도비명(南冥 先生 神道碑銘)’을 얻었으나, 건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1812년(순조12) 2월 8일, 삼가현 끝자락인 봉산면 죽죽리 산 26번지 용암서원 마당, 즉 용암서원 묘정(廟庭)에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를 건립했다. 송시열이 지은 ‘남명 선생 신도비명(南冥 先生 神道碑銘)’을 139년 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남명의 세계(世系, 자손록)’를 빼고 세웠다. 즉 ‘남명 신도비’를, ‘용암서원 묘정비’로 대체해서 건립했다.
용암서원 묘정비문 끝 부분에 삼가현감 오철상(吳澈常, 1765~1838, 안성 출생) 등이 서인(노론)의 종주인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창주 김익희(滄洲 金益熙), 송치규(宋穉圭)를 칭송하는 내용을 추가로 새겨 넣었다.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용암서원에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라는 이름의 기념비를 떡하니 세운 것이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며, 돈-권력을 챙긴 자(者)들의 ‘기득권-이익 카르텔’을 명확하게 보여준 보편적(?) 형태의 상징물이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다. 경상우도인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고.
1623년(광해15) 계해정변(癸亥政變)→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1728년(영조4) 무신혁명(戊申革命)→1862년(철종13) 단성·진주 임술농민항쟁을 거치면서, 진주 합천 고령 등 경상우도는 ‘반역향(反逆鄕)’으로 매도돼 몰락했다. 이를 노론세력들이 명료하게 확인하며 축배를 들고 파티를 즐긴 사건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고향인 삼가현(三嘉縣) 용암서원 안에 건립한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인 것이다.
남명과 내암, 그들의 제자들이 황천에서 통곡하고 있을 게다. 오호애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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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河洺)은 승의랑(정6품) 이전(李瑑, 1607~1668)의 맏사위다. 달성 하빈면의 이전(李瑑)은 오계 조정립(梧溪 曺珽立, 정주목사·덕천서원장, 1728년 무신혁명 조성좌 고조)의 사위다. 하명 아버지는 하달도(河達道), 조부는 창주 하증(滄洲 河憕, 진사·덕천서원장)으로, 진주시 대곡면 단목 출생이다. 오계 조정립은 창주 하증의 동생인 하협(河悏, 1583~1625, 진사)의 묘갈명을 지었다.
1665년(현종6) 진주 유생 최백년이 성균관에 하명(河洺)의 단목 하씨들이 ‘역적 정인홍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고발했다. 진주향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화풀이로 무인(武人) 출신 유생 최백련이 무고(誣告)한 변론을 조정(朝廷)에 올린 것이다. 하협 삼촌인 하진보(河晉寶, 22세 요절한 정연 장인)가 내암 정인홍과 사돈지간이었기에, 단목의 진양하씨를 북인 잔당파로 몰고 갔다.
이른바 무고사건을 하명(河洺)이 서인(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도움으로 해결한 후, 김해부사 하진보 및 생원 하위보(河魏寶)의 하증(河憕) 및 하협(河悏) 문중은 핵심 북인(北人)에서 집권 서인(노론)으로 당색을 바꿔 버린다.
8년 뒤 1673년(현종14) 진사 하명(河洺)이 송시열에게 ‘남명 선생 신도비명(南冥 先生 神道碑銘)’을 받아 온다.
우암 송시열로부터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난 진사 하명(河洺, 1630~1677)은 송시열을 대현인으로 섬기는 게 은혜를 갚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보답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길은 ‘송시열 찬 남명 신도비명(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명)’의 묘갈을 경상우도에 세우는 거였다. 하지만 계해정변 후에도 그나마 남아 있던 남명-내암 지지자들에 의해 ‘송시열 찬(撰) 남명 신도비’를 세우지 못했다. 오히려 1685년(숙종11) ‘미수 허묵 찬 남명 신도비’를 남명 묘소에 건립했다.
단목 출생인 하명(河洺)의 염원은 139년 뒤 1812년(순조12) 노론인 오철상·송석경·신호인이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를 건립하므로써 이뤄진다. 1909년에는 남명 후손들이 주간하여 시천면 사리 남명 묘소에 ‘송시열 찬 남명 신도비’까지 건립함에 따라 꿈(?)을 실현하게 됐다.
27년 뒤 남명 후손들은 미수 허묵(眉叟 許穆, 1595~1682)이 생전에 남명을 비판했다고 하여 1926년 ‘허목 찬 남명 신도비’마저 깨버렸다.
후손들이 남명 정신을 훼손하는 형국이 됐다. 남명처럼 숭고한 보편적 가치를 올곧게 지키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남명 후손들이 보여준 역사의 복잡 미묘한 모습이다.
‘남명 세계(世系, 자손록)’가 포함된 ‘남명 선생 신도비’는 1909년 남명 조식 후손들이 산청 덕산 남명 묘소 밑에 세웠다. ‘南冥 先生 神道碑’ 전액(篆額: 머리글)은 1908년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역임한 전서체 대가인 김성근(金聲根, 1835~1918)이 썼다. 장김(壯金: 안동김씨)인 김성근은 한일병합 후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 5만원을 받는 등 친일파로 전락했다. 김성근은 서인의 거두인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김상헌 형)의 9세손이다. 비문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김학수(金鶴洙, 61세)가 썼다.
현재 송시열 찬(撰) ‘남명 선생 신도비’는 ‘번역문 비석’과 함께 자랑스럽게(?) 덕산 남명기념관 마당에 옮겨와 서 있다.
향천서원(香川書院)이 1609년(광해2) 용암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영의정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의 업적 등이 들어가 있는 진짜 ‘용암서원 묘정비’를 세웠어야 했다. 그런데 송시열이 ‘남명 신도비’ 용(用)으로 지은 것을 139년 뒤 삼가현감 오철상(吳澈常) 등이 송시열-송익필-김익필 등 그들-서인(노론)들의 종주를 기리는 글을 뒷 부분에 아래와 같이 추가로 가필(加筆)하여 묘정비를 오만하고 당당하게 세웠다.
|인용부분
“(남명) 묘도(墓道)에는 이미 (1685년) 다른 사람의 글(허목 찬 ‘남명 신도비명’)을 사용했다. 여러 선비가 (용암서원) 묘정(廟庭)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모색했다. 이미 송우암 선생이 (1673년 현종14년에) 지은 글이 있으니 세계(世系)와 자손록을 삭제하면 사당[廟]에 사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송구봉(宋龜峰, 송익필)이나 김창주(金滄洲, 김익희)의 묘문(墓文)과 관련된 일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송선생(宋先生, 송시열)의 6대손 집의(執義) 치규(穉圭, 그후 대사헌)도 이것을 듣고 일이 이뤄진 것을 기뻐했다. 오호라! 선생(先生, 송시열)의 도덕이 여기에 밝게 빛나는구나. 위대한 현인(大賢人, 송시열)의 문자가 더욱이 이를 증명한다. 통훈대부 행 삼가현감 오철상 식(識) 병서”
삼가현감 오철상(吳澈常, 1765~1838, 해주오씨 정무공파)은 골수 노론이다. 오철상의 6촌 형이 노주 오희상(老洲 吳熙常, 1763~1833, 부: 이조판서 오재순, 외조부: 노론의 좌장인 영의정 이천보)이다.
1812년(순조12) 2월 당시 묘정비 건립은 용암서원 인근 삼가현 봉산면 노파마을에 살고 있던 신계성(申季誠) 9세손인 삼주 신호인(三洲 申顥仁, 1762~1832)과, 남명 측실(은진송씨)의 친정 고향인 삼가현 대병면 역평리의 구음 송석경(龜陰 宋錫璟, 1734~1810, 송치원 6세손)이 주도적으로 했다. 신호인은 노론인 삼가현 봉산면 술곡의 모려 최남두(茅廬 崔南斗, 1720~1777) 문인이며, 송석경은 김장생 계열의 노론이다. 이처럼 골수 노론인 오철상 삼가현감과 노론 유학 신호인(申顥仁), 김장생 문인인 송석경(宋錫璟) 등이 주간하여 이른바 묘정비를 세웠다. 송석경 5대조인 송치원(宋致遠, 1600~1680, 부호군)은 내암 제자인 존양재 송정렴(存養齋 宋挺濂, 1612~1684)의 7촌 아재다. 송석경 장인은 진주 이반성의 노론 정경신(鄭經臣, 1703~1777, 정문부 6세손)이다.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 등 남명학파와 대척점에 있던 서인(노론)들이 남명학파의 상징적 장소인 용암서원에 그들의 종주인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창주 김익희(滄洲 金益熙) 등을 칭송하는 묘정비를 세워 헤게모니까지 장악했다는 걸 반포(頒布)했다.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1534~1599, 고양 출생)은 1589년(선조22) 남명 제자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사건) 기획자이며 김장생의 스승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좌의정)은 이이-성혼(李珥-成渾)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형조참판)의 문인으로 노론의 좌장이다. 창주 김익희(滄洲 金益熙, 1610~1656, 대제학)는 김장생의 손자다.
묘정비는 그 뒤 1868년(고종5) 서원훼철령으로 용암서원이 훼철되고, 서원 마당에 홀로 서 있었다. 1988년 합천댐으로 인한 수몰 위험으로 200m 위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2011년 2월 용암서원 보존회에서 38km 떨어진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 새로 건립한 용암서원 안으로 이전했다. (계속)

이 ‘신도비명’ 중 남명 조식의 자손록(子孫錄, 세계-世系)을 빼고 돌에 새겨 1812년(순조12) 2월 8일 삼가현감인 골수 노론 오철상(吳澈常, 1765~1838)이 묘정비문을 쓰고 세웠다. 현재 산청군 시천면 남명 기념관 마당에 있는 ‘남명 선생 신도비(南冥 先生 神道碑)’의 내용과 동일하다. 다만, 묘정비 끝 부분에 삼가현감 오철상 등이 서인(노론)의 종주인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창주 김익희(滄洲 金益熙), 송치규(宋穉圭)를 칭송하는 내용을 추가로 넣었다. 노론인 삼가현 봉산면 노파마을의 신호인(申顥仁, 신계성 9세손)과 삼가현 역평리 송석경(宋錫璟, 송치원 6세손)이 묘정비 건립에 앞장섰다. 집권 노론(서인)으로 전향한 경상우도인의 한심하고 비루한 서글픈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