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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천국의 꽃길 – 이호석 수필가

2022년 10월 첫 주다. 그렇게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아침저녁이면 제법 서늘한 날씨가 가을을 느끼게 한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도 서서히 새로운 모습으로 치장을 한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 산야를 미리 그려본다.
언제부터인지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젊은 시절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이렇게 좋은 계절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내 나이 일흔 중반에 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만도 하다. 생로병사의 자연 섭리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이런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미련하고 욕심 많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나 보다.
매일 아침 가까이에 있는 친구와 함께 마을 앞 황강변 체육공원에 나가 걷기 운동을 한다. 이른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푼 다음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반기고, 창문 앞 화단의 코스모스꽃들이 해맑은 얼굴로 하늘하늘 춤을 춘다.
공원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다. 공원에는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핑크뮬리가 장관을 이루며 터줏대감 행세를 한다. 그 주위로 노랑코스모스, 구절초 등 아름다운 꽃들이 곳곳에 무리를 지어 서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평소 꽃이라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을 시작으로 피는 봄·여름철의 온갖 아름다운 꽃들을 먼저 생각하였는데, 가을철에도 이렇게 예쁜 꽃들이 많은 줄을 미처 몰랐다. 화려한 봄꽃은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예쁘게 꾸민 여성상이라면, 가을꽃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조금은 우아하고 무게감이 있어 준수한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활짝 핀 꽃무리 속의 길을 걸을 때는 마치 내가 속세를 떠나 어릴 적부터 말로만 들어오던 천국의 꽃길을 걷는 기분이다. 천국의 꽃길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 꽃길보다 더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다.
공원 둘레로 잘 다듬어진 자전거 길을 따라 수년 전에 심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고깔을 뒤집어쓴 특유의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며 공원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유유히 흐르며 강물을 바라본다. 언제나 변함없이 지역민들의 생명수 역할을 해주는 강물에 고마움을 보낸다. 강 건너 동산에는 잠에서 막 깨어난 태양이 얕은 구름 이불을 걷어 젖히고 서서히 얼굴을 내밀드니 흐르는 강물에 세수를 하나 보다. 잔잔한 은빛 물결이 한층 아름답다.
이곳을 거닐 때면 가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불러낸다. 봄이면 온갖 풀꽃이 만발한 강가에서 남녀 또래들이 함께 소를 먹이며, 꽃향기 풍기는 시원한 공기를 맘껏 마시며 천진스레 뛰놀았다. 여름에는 하얀 백사장에서 더위도 잊고 마구 뒹굴다가 새까맣게 그을린 몸뚱이에 땀과 모래가 범벅되면 시원한 강물에 첨벙첨벙 뛰어들기도 했다.
가을에는 강 인접 들에 있던 우리 논에 타작마당을 만들어 놓고 어른들은 잘 말린 작은 볏단을 들고 ‘와릉와릉’ 탈곡기를 밟으며 타작을 하고, 나는 뒤로 던져지는 짚단을 주워내기에 바빴다.
오곡을 추수하는 농촌의 가을은 가장 힘들고 바쁜 계절이다. 그렇지만 햅쌀로 지은 구수하고 반지르르한 하얀 쌀밥과 갈치에 무를 쓸어 넣고 끓인 갈칫국, 집에서 만든 청국장 등 가을 반찬이 농부들의 입맛을 한껏 돋운다. 봄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 허약해진 체력을 보강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6,70년대 보릿고개 시절을 보낸 어르신들은 평소에는 상대적 빈곤감으로 현실에 항상 불만스러워 하다가도 가끔 예전에는 지옥 같은 생활을 하였는데, 지금은 그때 비하면 천국(천당)에서 산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한다.
나물죽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하고, 지게가 농촌 남정네들의 필수품이던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농촌은 집집이 냉장고에는 과일 등 먹거리가 가득하고, 자가용 자동차가 예전 지게 숫자만큼이나 되니 가히 천국이라고 할만하다.
내가 치열한 생존경쟁의 일선에서 물러난 지 벌써 16년이 되었다. 수년 전부터 모든 욕심(재물욕, 명예욕 등)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자식들과 그 가족들의 인생은 각자의 노력과 운명에 달린 것이라고 단정하고, 앞으로는 지나친 관심은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욕심과 자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야멸차게 끊어 버리니 내 마음이 한층 가벼워져 마치 천국에 사는 것처럼 항상 편안하고 즐겁다.
이 시대 우리의 환경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건강한 몸으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살면 바로 천국이요, 평생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쓰며 아귀다툼에 벗어나지 못하면 항상 지옥의 문전에서 허덕이는 꼴이라는 것을 나는 이 나이가 되고서야 겨우 알았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걷는 아름다운 꽃길은 바로 천국의 꽃길이다. 나는 오늘도 마을 앞 공원에서 천국의 꽃길을 행복한 마음으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