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홈

‘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2) 혜암스님의 수행이력

혜암스님은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원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인근의 사찰을 자주 찾아 참배하며 동.서양의 위인전 읽기를 좋아하였던 스님은 불교경전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는 배움에 뜻이 있으면 일본으로 건너가고 삶이 극도로 궁핍하면 만주로 향하던 시절이였다. 스님은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구약과 신약, 유교의 사서삼경, 불교의 조사어록 등을 두루 섭렵하며 동양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의 고승전집을 읽다가 일휴선사 모친의 유언서에 감화를 받고 발심하였으며 또한 선관책진을 탐독하다가 ‘아유일권경하니(나에게 한권의 경전이 있으니) / 불인지묵성이라(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 전개무일자호호되(펼치면 한글자도 없으되) / 상방대광명이로되(항상 큰 광명을 놓도다)’라는 대목에서 크게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하고 해방이 되자 즉시 귀국하였따.
스님은 1946년(27세) 초여름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출가하여 출가일로부터 일일일식과 장좌불와를 하며 용맹정진하였다. 초가을 무렵 공양주를 계속하며 행자로서 당시 가야총림의 조실이신 효봉스님을 찾아뵙고 “무”자 화두를 결택받아 생사를 뛰어넘는 용맹정진을 계속 하였으니 그 정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어느날 밥을 퍼다가 대분심이 일어나 소임을 다른 스님에게 부탁하고 백련암 뒷편 환적대로 올라갔다. 환적스님이 공부했다는 환적굴은 찾지 못했으나 다른 바위굴에서 “일주일안에 도를 깨치지 모샇면 죽어도 좋다”는 결연한 각오로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장좌불와하며 일주일동안 삼매에 들어 단식 용맹정진하였다.
그러나 끝내 도를 깨치지 못하고 해인사로 내려왔다. 이때 해인사 대중들은 스님을 찾으려 가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이로부터 스님은 “공부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50여년을 장좌불와하며 계속 용맹정진하였다.
늦가을 우연히 해인사에 들른 서웅스님께서 이와 같이 정진하고 있는 행자를 보고 퇴설당에 주석하고 계시는 인곡선사를 보고 친견케 하였다.
인곡선사께서 행자를 보자 대뜸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행자는 “아ㅡ악”하고 일갈을 하였다.
또 “네 고향이 어디냐?”하시니 행자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또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셨다. 행자는 즉시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렸다. 선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우리집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서 말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의 넓적다리에 뜸을 떴다. 이 이치를 알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러자마자 행자는 주먹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에 인공선사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행자의 머리를 만져 주시고 상좌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10월 15일(음) 인곡스님을 은사로, 효봉스님을 계사로 사미께를 수지하여 득도하였으니 “성관”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수계하자마자 구참납자들의 용맹정진 도량인 퇴설당 선원에 방부를 들이려하자 갓계받은 사미라하여 대중들이 반대하였다. 그러자 효봉 조실 스님께서 “공부하는데 구참, 신참이 어디있느냐. 성관 수좌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시자, 대중들이 아무 말을 못했다. 그리하여 가야 총림의 퇴설당 선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일일일식과 용맹정진을 계속하며 동안거를 성만하였다.
이 병술년 동안거는 가야총림 개설직후 첫 안거이자 혜암스님의 수계이후 수선안거였다.
1985년(66세)에는 해인총림 부방장에 위촉되어 총림의 발전과 총림대중의 용맹정진 가풍진작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혜암스님은 선원대중들에게 항상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라고 가르치며 납자로서 철저히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1987년(68세)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90년(71세)에는 지리산 두솔암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혜안스님은 출거 이후 가야산 해인사 선원에서 수신안거이래 오대산 상원사와 오대, 희양산 봉암사, 금정산 범어사, 설악산 오세암, 태백산 동암,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지리산 상무 주암과 칠불암, 조계산 송광사 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선사를 모시고 일일일식과 오후불식,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하여 45 하안거를 성만하였으니 가히 본분납자의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가야산 암굴단식 용맹정진, 설악산 오세암, 사지 고행정진, 오대산 사고암 단식 고행정진 등은 대표적인 두타 고행정진이라 할 수 있다.
1991년(72세) 봄부터 93년 가을까지는 해인사 원당암에서 안거하며 사부대중을 지도하였다. 혜암스님은 정법선양을 위하여 교화방편으로 81년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을 개원하여 매년 하.동안거와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 철야 용맹정진법회를 20여년동안 주관하였다.
96년에는 달마선원(시민선원. 108평)을 신축하여 이해 가을부터는 원당암에 주석하며 매 안거마다 100여 안거대중과 200여 일주일 용맹정진 대중 그리고 매우러 500여 토요철야법회 대중에게 참선을 적극 지도함으로써 선의 대중화, 생활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93년(74세) 11월 당시 조계종 종정이시며 해인총림 방장이셨던 성철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시자 뒤를 이어 해인총림 제 6대 방장에 추대되어 퇴설당에 주석하며 500여 총림대중을 지도하였다. 특히 방장재임 중 선우너대중에게는 모두 오후불식을 여법히 지키도록 하였다.
1994년(75세) 4월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어 조계종 계획불사시 계획회의를 출범시켜 개혁종단을 탄생케하고 그 이후에도 종단의 인정과 지속적인 개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1998년(79세) 11월 조계종 종단사태시에도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종헌종법준수’라는 파사현정의 기치를 높이 천명하며 사태가 합법적으로 해결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생을 청정한 계행과 장좌불와, 일일일식 등 철저한 두타고행으로 수행정진하신 혜암스님은 사대부중의 여망에 부응하여 199년(80세) 4월 2일 종정추대회의에서 조계종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이병생 시민기자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