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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50주년 삼가고 1회 졸업생의 추억 – 옥철호 삼가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

저조한 출산율로 인해 농촌지역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듣기 어려운 요즘과 달리 6~70년대에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기임에도 출산율이 너무 높아 정부에서는 산아제한 정책을 정책의 우선 순위에 두고 대대적으로 산아제한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학생수가 넘쳐나고 다수의 학생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뒤 경제적인 사정등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도시의 산업전선에 뛰어 들기도 했다.
필자가 다녔던 당시 삼가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2천명이 넘었고 학급당 70명 이상이였으며 넘쳐나는 학생수를 감당하지 못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했고 중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뤄 합격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후에는 지역에 고등학교가 없는 관계로 일부 소수의 학생들만이 도시지역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곤 했다.
이러한 사정을 잘알고 있는 지역의 뜻있는 유지분들이 수년간 지역 고등학교 신설을 도 교육청에 건의하여 운 좋게도 내가 삼가중학교를 졸업하던 1972년도에 삼가고등학교가 개교하였고 필자도 당당히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자랑스러운 제1회 입학생이 되었다.
입학생은 140여명으로 기억되고 인문반과 상업반등 2개반으로 나눠 교실당 70여명이 남녀공학으로 한 교실에서 남녀학생들이 같이 수업을 받았다.
막상 개교는 했으나 학교 내외부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운동장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외부에 별도로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은 비위생적이기도 했지만 선생님과 남녀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해야하는 실정 이었다.
입학생들의 구성내용을 살펴보면 지역에 고등학교가 없었던 터라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은 물론이고 인근 의령군 대의면에서 중학교 졸업후 집에서 2~3년씩 쉬고 있던 학생들이 대거 입학하여 절반정도는 중학교 선배들이었다. 심지어 형재가 같이 입학하여 한 교실에서 형과 동생이 동급생이 된 경우도 두팀이나 되었다.
점심은 급식소가 없어 교실에서 먹다보니 음식냄새가 교실 곳곳에 스며들었지만 당연한 일이라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에서도 군사훈련을 시키라는 정부방침에 따라 장교출신 교련선생님이 학교마다 배치되었고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 수준의 교련수업을 받았다.
운동장에서 수업해야 하는 체육시간과 교련시간에는 학교운동장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뽑는 일도 학생들의 몫으로 수업의 일부분이 되었다. 운동장은 인근 농지로 진입하던 농로를 모두 막아 만들었기 때문에 학교운동장을 지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수가 없어 수업중에 농민들이 리어카를 끌고가는 모습을 흔치않게 볼수 있었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학생들이 담장이 없는 인근농지로 쉽게 넘어가 수박, 참외 서리도 종종 했으며 운동장을 지나가는 농민들은 학교 정문에 설치된 게시판을 통해 자녀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선배도 후배도 없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출발했던 우리 1회 동기생들은 모두들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후 중앙부처나 세무서, 관세청, 교육청, 도청,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학교선생님이 되기도 했으며 일부는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동기생들도 많이 있다.
삼가고 1회 동기들은 졸업후 35년째 되던 2010년도에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동기들을 수소문하여 일백여명의 졸업생중 43명이 모여 1회 동기회 모임을 결성하고 모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도 주고 있으며 당시 은사님도 매년 동기회 모임시 초청하여 학창시절 추억의 말씀도 들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금년 말에도 팔순을 훌쩍 넘긴 은사님 부부를 모시고 동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컴퓨터, 모바일 등 정보화 시대 교육환경이 너무도 많이 좋아졌지만 학생수가 점차 줄어드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 이제 까까머리 1회 동기생들은 모두 직장에서 은퇴하고 칠순을 눈앞에 둔 할아버자 할머니가 되어 노후 생활을 보내면서 잠시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