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홈

‘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8) “교과서에 실려야 할 남명 선생의 정신”

2021년 11월 삼가면 외토리 용암서원에서 “남명 조식 선생 교과서 수록 운동 발대식”이 있었다. 이날 낭독된 결의문에는 “우리는 합천군이 남명 사상의 진원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선생의 사상과 학문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초,중.고 교과서 수록운동을 비롯한 관련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고 했다. 합천의 대표적 정신을 정한다면, 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敬義) 사상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고 있다. 삼가면 토동은 남명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이곳에 “을묘사직소”를 쓴 뇌룡정과 남명 선생 위패를 모신 용암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 뇌룡정에서 작성한 사직상소문인 “을묘사직소”는 조선과 대한민국을 통틀어 가장 강직하고 올곧은 상소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명 ‘단성현감사직소’ 또는 ‘단성소’라고도 한다. 선생은 이 을묘사직소를 통해 “나랏일을 잘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사(政事)나 형벌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殿下)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며 “왕도의 표준법도를 세워야 되며 이 표준법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당시 조정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김종철 용암서원 원장은 “인조반정 등 역사적 영향으로 남명 선생이 퇴계 선생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며 “지금부터라도 선생의 출생지인 우리 합천군이 앞장서서 선생의 사상과 학문이 널리 전파되어 합천과 경남(부.울.경)을 넘어 나라 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명 선생은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이다. 1501년(연산군 7) 7월 10일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으며, 1572년(선조 5) 2월 21일 향년 70세로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별세하셨다.
남명 선생은 실천을 중시하셨는데, 말만 하거나 자기의 조그만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이렇게 실천궁행하는 일을 강조했기에 그의 문하에 있었던 제자들도 다른 선비들과 확실히 남달랐다. 벼슬길에 올랐던 제자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바른 정치를 하였고, 고향에 남았던 제자들은 공부와 농사 등 몸소 실천해 나가며 모든 일에 이웃의 본보기가 되었다.
남명은 불의(不義)를 보면 일어나 싸우고 바르게 생각하여 올바른 것은 꼭 실천하라고 하였고, 나라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과감히 일어나 구하라고 가르쳤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문하생에서 정인홍, 곽재우, 전치원, 이대기, 박사체 등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목숨을 건 의병장만도 50여 명이 넘었다.
또한 그는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하는 당시 유학자들을 대단히 혐오했다. 출세나 부귀영화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현실 및 정치적 모순을 고치기 위해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사회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도 않았다. 남명의 그러한 기상이 잘 드러난 사건은 명종(明宗)이 을묘년(1555년)에 그를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며 임금께 올렸던 글,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 잘 드러나 있다.
/박옥화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