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25) 경재(敬齋) 하연(河演) 선생의 생애와 야로면에 남긴 흔적
경재 하연 선생은 1376(고려우왕 2년)년 산청군 단성면 여사촌에서 부 진양인 목옹공(木翁公) 하자종(河自宗)과 모 진양정씨 사이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이다. 증조는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진천부원군(晉川府院君) 송헌(松軒)인데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다. 조부는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고헌(苦軒)공 하윤원(河允源)이다. 부 목옹공(木翁公) 하자종(河自宗)은 고려에 벼슬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이성계의 끈질긴 회유를 뿌리치고 두문동 72현(七十二賢)에 동참하였으나 뒤에 아들의 귀현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6세 이후로는 부친이 주로 외직으로 있었으므로 옮겨다니며 생활하셨다. 13세(1388)에 부친을 따라 야은 (冶隱) 길재(吉再)를 대면하고 불사이군의 의리에 대하여 배운바를 설명하자 야은은 이 아이가 우리들 기성세대가 지켜야 할 지도자의 덕목을 올바로 지적했다고 대견하게 여긴바가 있다. 14세때부터 포은(圃隱)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힘을 쏟아 성리학(性理學)에 사구(思究)가 깊었다. 포은을 친 부모와 같이 따라 정동골육친(精同骨肉親)이라 표현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으나 4년 뒤에 포은이 비명횡사하니 경재의 슬픔은 크고 애통한 것이었다. 19세(1394)에 성주이씨 존성(存性)의 넷째 따님과 결혼하니 원정공의 외손자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과 동서간이 되었다. 21세되던 해의 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여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22세에 봉상시(奉常諡)의 봉사(奉事)로 공직에 첫 출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藝文館),사헌부(司憲府),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승정원(承政院) 및 6조(6曹)의 요직과 고을원 2회,네차례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19년에는 조선 건국 후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44세의 나이로 참찬관(參贊官)으로 발탁되는 영예를 안았다. 45세(1420)에 예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중국에 가는 사신(使臣)으로 선발되었는데 학문 시문 식견 언변 기지 담력 등 뛰어난 자질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48세(1424)때는 세종에게 척불소(斥佛疏)를 올려 조선의 개국이념인 숭유배불정책을 강화해 나가도록 권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50세(1425)에는 경상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재직할 때 세종임금의 명을 받들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편찬한바 있는데 현재에 이르러 다른 도의 지리지는 다 없어졌으나 경상도 지리지만 보존되고 있어 현존 최고의 조선시대의 지리지(地理志)이다. 1430년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실 때에 왕명에 의하여 정승 허조(許稠)와 함께 유교국가 예제(禮制)의 기본골격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한바 있다. 56세 때인 세종13년(1431)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제수(除授)되는 영광을 얻었다. 대제학을 문형(文衡)이라고도 하는데 한 집안에서 문형에 올랐다 하면 정승 판서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였다. 62세(1437)때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세제(稅制)를 만들어 우선 영남과 호남에 실시하여 납세를 현실에 맞게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는 데 주력하였다. 70세(1445)에 우의정이 되시니 비로소 상신(相臣)의 반열에 올랐다. 72세에 좌의정으로 영전되고 74세(1449)에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 5대 임금 문종이 즉위하여 낡은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 하자 선생은 이단을 숭상해서 안된다고 굳게 간언(諫言)하니 문종은 과거 세자때의 스승인 노신(老臣)의 진언을 가납하여 대자암 중수를 중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경재 하연(敬齋 河演) 선생은 말단 공직으로부터 출사하여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인 영의정(領議政)의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근검(勤儉) 청백(淸白)의 정신으로 정진하여 나라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고 문종원년(1451) 76세의 나이로 퇴임하게 된다. 퇴임하시던 그 해 하씨(河氏)의 족보인 경태(신미)보를 간행하시니 우리나라 족보문화의 효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나 아깝게도 후손이 불민하여 그 원본을 보존 전수치 못하고 서문만이 진양지(晉陽誌)에 소개되고 있을 따름이다. 오하(吾河)의 경태보(景泰譜)보다 25년이나 늦게 간행된 안동권문(安東權門)의 성화보(成化譜)가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라 하여 규장각(奎章閣) 도서관에 소장되고 있다. 경재 하연(敬齋 河演) 선생은 78세(1453년 8월15일)를 일기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별세하시니 단종 임금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3일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단종 2년(1454)에 문효(文孝)라는 시호가 내리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셨다. 진양인 사직공의 12세손,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배위 정경부인 성주이씨 합봉) 문효공 휘(諱) 연(演)의 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422(소례산;시흥시 향토유적 제3호)에 모시고 소산서원(蘇山書院)에 봉안하고 있다. 좌의정 남지(南智)선생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짓고,세조 9년(1463)에 강희맹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경재 하연선생은 태평시대인 세종조에 관직에 입문(21세) 하여 76세에 영의정의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 나라경영에 심혈을 기울여 봉사함으로써, 조선의 초창기 국법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로를 남김으로써, 위대한 사표(師表)가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