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추억 속 봄 길을 걷다 – 이호석 수필가
3월 하순 어느 날이다. 춘분이 지나는데도 아침저녁으로는 겨울 추위가 가볍게 남아 있다. 그러나 한낮의 날씨는 화창하고 따뜻하다. 점심을 먹고 무심코 집 뒤 골짜기를 바라본다. 조금 떨어진 도랑가 논두렁에 홍매화 몇 그루가 붉은 무리를 지어 손짓한다. 나는 지난가을부터 겨울이 다 지나가도록 눈길 한번 주지 않았는데, 아는 체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그곳 매화꽃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만발하여 이웃에 있는 나에게 자랑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홍조 띤 얼굴로 나를 부른다. 반갑게 손짓하는 매화꽃을 뿌리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골짜기를 오른다. 매화꽃이 장식한 논두렁에 다다르니 봄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며 반갑게 맞이한다. 옆 도랑에는 아직도 차가운 계곡물이 졸졸 흐르며 언저리 곳곳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버들강아지 뿌리를 간지라며 잠을 깨운다.
산기슭과 논밭을 품고 있는 골짜기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멀리서 가냘프게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도 그대로다. 옆에 있는 양지쪽 밭머리에는 지난가을에 심어놓은 마늘이 한 뼘이나 자라 새파란 잎을 흔들며 봄볕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주변 논밭은 아직도 겨울 정취 그대로다. 겨우내 갈색으로 변한 키 큰 풀들이 노인의 엉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서걱 서로 비벼대며 겨울을 떨쳐버리려고 몸부림친다. 그 무리 사이에 지난해 농작물을 수확하고 방치한 하우스에는 찢어진 비닐이 이리저리 펄럭이고 있고, 앙상한 철골만 서 있는 모습이 주변을 스산하게 한다.
올해도 계절의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어릴 적 추억 속의 봄은 아니다. 언제나 정겹게 느껴지던 골짜기가 오늘따라 황량하고 외로움이 감돈다. 옛 추억 속의 봄 풍경을 더듬어 본다. 이맘때면 온 들녘이 지난가을에 심어놓은 밀, 보리가 푸른 바다를 이루고 봄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며 농부들에게 풍년의 희망을 품게 하였다. 봄이 짙어지면 종달새, 제비가 보리밭 위를 신나게 날아다니며 봄노래로 고생하는 농부들을 위로해 준다.
들녘에서 나물케는 아가씨들이 봄바람에 나들이가 즐거운지 “하하 호호” 조잘거리며, 지나가는 총각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또 마을 나무꾼들이 나뭇짐에 진달래꽃을 꽂고 너울거리며 양지바른 산등성이 길을 따라 쫄래쫄래 내려오는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 봄 풍경이었다. 그 시절 나물 캐던 아가씨와 마을 총각들은 지금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리운 얼굴들이 보고 싶다.
지금은 봄이 와도 밀, 보리를 심은 논밭이 없다. 예부터 농촌의 봄을 상징하며 시나 동화의 주제가 되었던 종달새와 제비가 농촌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십수 년이 되었다. 들에는 보리밭이 없고, 농촌의 집들은 초가집 처마가 없는 양옥으로 변해 버려 그들의 서식처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또 농가마다 살림 밑천이라며 한두 마리씩 기르던 누렁이 소를 몰고 나와 이 골짝 저 골짝 돌아다니며 소먹이던 목동들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회가 발전하여 살기는 편하고 편리하지만, 어릴 적 정겹고 아름답던 풍경들이 하나둘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게 여간 서운치 않다. 세월에 떠밀려 쌓인 나이 때문인지 꽃 향연이 벌어지는 봄이 되어도 삭막하고 쓸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외로움과 함께 논두렁에 서서 골짜기의 논밭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주인들을 소환해 본다. 산자락 끝에 자리하고 있는 밭 주인 ○○할아버지는 수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 아래 논 주인 ○○할아버지도 3, 4년 전에 작고하셨다. 또 그 옆에 있는 작은 배 과수원의 주인아저씨도 몸이 불편하여 과수원을 방치한 지 벌써 2, 3년이 되었다. 텅 빈 논밭은 대부분 주인이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고령으로 돌아가셨거나 몸이 불편하여 곳곳의 논밭이 묵고 있어 안타까움을 준다. 논 가의 홍매화는 주인의 몸이 불편한 줄도 모르고 올해도 예쁜 꽃을 피우고 봄바람에 춤을 추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든다.
봄이 되면 소를 몰고 논밭을 갈며 “이랴” “자랴” 큰소리로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던 농부들도 보이지 않고, 농부의 닦달에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씩씩거리며 논밭을 갈던 소들도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한때 소를 대신하여 논밭을 갈며 둔탁한 기계음으로 골짜기를 시끄럽게 하던 경운기 소리도 차츰 사라지고 있다. 가끔 논밭 뒤 구석에 소를 대신 논밭을 갈던 경운기가 녹이 슬어 풀밭 속에 버려져 있기도 하다. 그 풍경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내가 자라면서 친구처럼 정들었던 이 골짜기도 몇 년 후면 황량한 벌판으로 변할 것 같아 내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렇다. 자연의 온갖 아름다운 꽃들도 겨울이 되면 말라비틀어져 보기 흉한 쓰레기가 되고, 가정에서 귀엽게 키우는 예쁜 반려동물도 또 그 동물을 기르는 사람도 영원할 수는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듯 모든 생물체는 생과 사가 있다는 자연의 섭리를 잘 알면서도 때로는 착각하며 사는 게 사람인가 보다?
골짜기를 기웃거리며 옛 추억 속을 헤매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렸다. 추억과 헤어지기가 싫어 뒤돌아보며 집으로 내려온다. 봄옷을 여미게 한 골짜기 찬바람이 내 마음을 아는지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오며 나를 위로한다.
며칠 후면 골짜기 산기슭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만발하고 온 들판은 푸른 녹음으로 새롭게 장식할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추억 속의 봄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