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당당한 기개(氣槪)를 보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 이성동 논설위원
현재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인구의 도시편중과 노령화, 빈부격차, 청년일자리, 주택문제, 세대갈등 등의 사회문제는 물론 북한의 비핵화를 포함한 남북관계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올바른 사회, 올바른 국가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를 주도하고 해결해야 할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가’, 우리 경제가 제대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특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미가 중심이 되어 전환되고 있던 남북관계가 지난 3월 25일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으로 중국의 역할이 새롭게 부상되고 있는 한반도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사회, 제대로 된 국가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진취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르게 해야 한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글자는 의(義)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의(義)란 무엇인가,’ 이 시대의 문제와 결부해서 ‘마땅히(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문제해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key)이 의(義)에 있음을 인식할 때 의(義)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도 올바르게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의(義)로운 선비로 대표되는 성리학자는 남명 조식 선생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경(敬)과 의(義)’ 두 글자로 집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명은 이렇게 “內明者(내명자)는 敬(경)이요, 外斷者(외단자)는 義(의)다. –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행동으로 단행하는 것은 의(義)다”라는 글을 칼에 새겨 휴대하면서 또한 자신이 기거하던 방안에도 경(敬)과 의(義)를 크게 써놓고 수양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에 근본을 둔 수양과 의에 바탕을 둔 투철한 실천정신은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봉에 서서 국난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조식은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1501년생 동갑내기이면서 학문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같은 전형적인 성리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삶과 기상은 성리학이 담은 세계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넓었다. 그는 성리학을 넘어선 유일한 성리학자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당시 성리학자들이 배척했던 『장자(莊子)』에서 자신의 호(號)를 취한 것만 보아도 일반 유학자들과는 다른 면모를 가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속의 기준이나 세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조식의 학문 세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서 나타나듯 다분히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던 퇴계 이황의 성리학과는 다르게 의리(義理)와 의기(義氣)의 실천을 강조해 사회현실과 정치모순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추구했다. 이황의 성리학이 ‘사변철학(思辨哲學)’에 가까웠다면 조식의 성리학은 ‘사회비판철학(社會批判哲學)’에 가까웠다. 조식은 일상적인 생활과 몸가짐에 있어서도 의리(義理)와 의기(義氣) 그리고 사회비판의식을 놓지 않았다.
이렇듯 경의(敬義)의 학풍과 조선 선비의 강력한 기개(氣槪)를 보였던 조식은 ‘출처(出處)’ 문제에 있어서도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는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을 위해 성리학을 공부하는 당시의 유학자들을 대단히 혐오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산림(山林)에 거처하며 출세나 부귀영화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현실 및 정치적 모순을 고치기 위해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살았지만 단 한 순간도 사회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조식이 품은 그러한 기상이 잘 드러난 사건은 명종(明宗)이 을묘년(1555년)에 그를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며 임금께 올렸던 글,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대강을 적어보면 “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이미 잘못되어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벌써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멀어져버렸습니다. 자전(慈殿 : 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중종)의 한 외로운 자손일 뿐이니 백천(百千)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유학(儒學)을 이념으로 하는 왕조국가의 ‘군신(君臣)’ 관계는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의 관계다. 그러나 조식은 달랐다. 위의 ‘을묘사직소’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임금을 향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직언(直言)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감히(?) 임금을 ‘선왕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孤兒)’일 뿐이라고 부르고, 또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력 문정왕후(중종비, 명종의 어머니)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렇듯 그는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미덕으로 여긴 왕조의 군신 관계를 거부하고 권력의 부조리와 잘못된 사회현실에 당당하게 맞서며 선비의 당당한 기개(氣槪)를 보였다. 아마 남명 조식과 같은 사람이 이 시대에 이 땅에 살고 있다면 거침없이 적폐청산의 명분으로 정치보복을 하고 있는 현 정부를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