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체성(主體性)은 얼마인가요? – 박인욱 논설위원
한 사람의 이름, 즉 성명(姓名)은 단순히 한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자신이 구별됨을 일깨우게 하고, 또한 그러한 정체성을 넘어 자신 만의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부모님의 바램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이름만큼 우리들의 주체성도 제각각 다른 모습을 띄고 나타난다. 하지만 그런 개별적인 주체성도 공통된 심리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이를 ‘집단적 주체성’이라 한다. 한국인의 주체성은 미국인이나 일본인, 중국인과 구별하는 제 1의 정신 작용이다.
지금은 많이 변화되고 있다지만 아직도 중국의 정치인이나 영화배우의 이름들을 우리식의 한자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중국 대륙을 공산화한 ‘마오쩌뚱(毛澤東)’이다. 요즘도 쉰 살 이상의 중년들에게 ‘마오쩌뚱’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식의 한자발음으로 ‘모택동’하면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다. 대신 중국인들은 ‘마오쩌뚱’해야 알지 ‘모택동’하면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중국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름인 ‘모택동’을 왜 불렀을까? 이것은 중국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자주적인 의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중국의 것을 따라하려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 무서움이 있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배운다는 측면을 넘어 중국과 동질화하고, 거기에서 집단적 안정성을 추구하려는 의식이 결국은 한국인의 주체성 상실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영어를 국제 공용어로 생각하는 인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강하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한국인은 태어나면서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다 한다. 그런 강박관념은 언론 매체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신문을 펼쳐보자. 미국 대통령의 이름들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모두 한글 표기이다. 미국식의 성명 구조는 성(姓)이 뒤쪽에 이름이 앞에 있다. 이들 미대통령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적어 보면 ‘트럼프 도널드’, ‘오바마 버락’, ‘클린턴 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느 언론매체에서도 미국인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미국식으로 부르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생각한다. 한국에서 프로 야구 선수로 활약하는 외국인들도 미국식대로 영어나 한글로 적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선수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활동할 때에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외국의 표기법에 따라 이름을 앞에 성(姓)을 뒤에 놓고 쓰거나 말한다. 또 우리들 스스로도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서 우리들의 영어 표기식 이름에 ‘홍길동’을 ‘gil dong hong’이라고 자랑스럽게 적는다. 우리는 왜 홍길동을 ’hong gil dong’이라고 쓰지 못 하는가? 일본과 중국도 한국과 같이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성명 순서를 외국식에 맞춰 바뀌지 않고 그대로 영어로 쓴다. 대신 외국인이 물어보면 자신의 성은 앞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국민들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국을 초청 받고 갈 때에는 어느 나라 대변인도 한국의 대통령을 ‘사우스코리안 프레지던트 재인 문…’(SouthKorean President Jea in Moon…)이라 하는 나라는 없다. 하나 같이 ‘사우스코리안 프레지던트 문 재인…’(SouthKorean President Moon Jea in…)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이며 영문으로 된 우리나라의 공식 외교 문서에서도 외국의 성명 순서에 따라 ‘재인-문…’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식의 ‘문재인…’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즐겨 마시는 우리의 술인 ‘막걸리’를 생각해 보자. 영어를 아는 우리나라 사람일수록 외국인 친구나 지인들에게 ‘막걸리’를 ‘라이스 와인’(rice wine)이라 말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 말을 들은 외국인들은 막걸리를 서양식 개념의 ‘와인’으로 연상하기 마련이고 단지 한국 사람들이 쌀을 첨가해서 만든 것으로 오해한다. 또 막걸리가 한국인의 창작물이 아닌 서양의 것을 한국식으로 해석해 놓은 것으로 변질된다. 또 외국인들이 막걸리를 맛보고 다시 찾고자 할 때는 ‘막걸리’(makgeolli)라 부르지 않고 ‘rice wine’ 으로 발음하며 막걸리를 구입하려 한다. 이로써 한국인 스스로는 막걸리에 대한 능동적 주체성을 상실한 채 외국 문물을 단지 수용하고 따라 하는 독창성 없는 한국인으로 외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 사람들이 포도로 만든 모든 술을 ‘와인’으로만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샴폐인’ 과 ‘꼬냑’도 그 재료는 포도이지만 맛과 추출 방법에 차이가 있으므로 샴폐인을 ‘샴폐인’이라 하고 꼬냑을 ‘꼬냑“이라 말하며 구별하는 것이다. 외국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들에게 가이드가 와인을 ‘포도로 만든 막걸리’라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외국인들은 ‘포도로 만든 막걸리’라 말하는 것을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막걸리를 ‘쌀로 만든 와인’이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막걸리를 ‘막걸리’(makgeolli)라고 발음과 표기를 할 때만이 외국인들은 막걸리를 한국인의 창작물로 생각하며 그 독창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굳이 막걸리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고자 할 때는 ‘쌀로 만든 한국인의 전통적인 술 중의 하나이다’ 하든지 ‘예로부터 힘든 일을 하는 농부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기운을 얻기 위해 즐겨 마시던 술이다’ 하면 될 것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합천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홍보하는 책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홍보물에는 한글로 ‘팔만대장경’이라 적혀 있고 그 옆의 괄호 안에는(Tripitaka:트리피타카) 라고 영문 표기가 있었다. 그 홍보물을 본 외국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십중팔구 ‘팔만대장경(Palmandeajanggyeong)’이라 발음하지 않고 ‘트리피타카’ 라고 발음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은 ‘팔만대장경’이 유일하므로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지 못한다. 단지 영미권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팔만대장경에 대한 긴 해설로써 대장경이란 뜻이 있는‘Tripitaka(트리피타카)’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한국에 온 미국인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집무하는 청와대를 방문하기 위해 한국의 택시기사에게 ‘블루 하우스(blue house)로 갑시다?’ 라는 말과 미국을 간 우리나라 사람이 미대통령이 집무하는 화이트 하우스를 미국인 택시기사에게 ‘백악관(baegakguan)에 갑시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서로 다르겠는가? 우리는 ‘세계화’ 내지 ‘글로벌화’ 라는 말을 자주 쓴다. 기본적으로 세계화나 글로벌화라는 개념이 전 세계의 표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적 장소를 달리 했던 지역이나 나라들이 서로 막힌 곳 없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에서 파생된 개념이지 문화적 이질을 하나의 세계로 정립하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각국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화를 문화적 측도(測度)에 따라 재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을 존중하므로 해서 지구촌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하는데 있다.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은 우리들 보다 서양인들이 훨씬 관대하다. 그런 관대함은 자국 문화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 문화에 대한 주체적 의식에서 확립되는 것이다.
한 국가의 국민적 주체성은 그 나라의 국민적 역사성에 바탕을 두고 변화한다. 오늘날 한국인의 주체성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역사에 그 답이 있듯이, 우리 젊은이들의 주체성의 문제는 우리 어른들의 주체성의 문제에서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요즘 와서 어른들과 젊은이들의 대립을 세대 간의 갈등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시대적 경험에서 오는 큰 차이를 한국인의 주체성의 변화로 오인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의식적 작용의 큰 차이이지 근본적인 의식의 차이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 속에 갇혀 태어나고 성장하고 있을 뿐이다. ‘세대 간’이란 구분적인 의미는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바램과 의식의 세계가 얼마만큼 젊은 세대들에게 투영되고 잘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역사적 연결고리를 해석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계화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서 한국인으로써 주체성 있는 삶을 원한다면 우리 어른들이 먼저 ‘나는 한국인으로써 주체성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