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뉴스홈

베네수엘라의 눈물 (1) – 문계성 수필가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매우 철학적이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말은 아마, 삶을 달관의 시각으로 보면 비극적이라기보다 희극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삶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희비극으로 단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제나 변명에도 불구하고, 단하나 분명한 비극은 사람의 굶주림이다.
저 아름다운 카리브해안의 낭만적인 나라, 검은 황금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진, 저 넓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풍요롭게 살던 나라, 그러나 이제 국민 8%에 해당하는 230 여 만 명이 살아 남기위해 난민처럼 외국을 유랑하고, 여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국에서 매춘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나라, 남은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하여 쓰레기장을 뒤지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잡아먹는 나라, 인민들이 굶주려 몸무게가 평균 11 키로그람 씩이나 줄어들고 – 당신의 몸무게가 굶주림 때문에 11키로그람이 줄어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 인구의 80%가 저녁을 굶는 불쌍한 나라가 된 베네수엘라를 보면서, 이 너무도 분명한 비극을 보면서 나는 왜 희극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일까. 왜 내가 불안해 지는 것일까. 내 눈에는, 이 나라의 비극이 마치 거대한 돈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비극을 희화(戲畫)한 커다란 포스트의 그림처럼 보였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검은 황금을 발아래에 묻어두고 음식을 달라며 거리를 행진하고, 살길을 찾아 외국으로 유랑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의 비극이 내게 희극일 수 는 없다. 그러나 어떤 비극은 매우 희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만약 베네수엘라를 찾아 온 이 비극이 천재(天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세계의 정부들은 일제히 이 재해를 도울 대책을 찾는 비상 회의를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국가들은 이 나라 를 향하여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며 이 나라의 자원을 압류하고는 잔인한 짓을 하고 있다. 세계의 국가들이 이 나라에 대하여는 왜 이렇게 자비가 없을까. 누가 보아도 이 재앙은 이 나라 인민들의 선택이 불러온 인재(人災)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비극의 시작은, 1998년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얼치기 좌파적 포플리스트 차베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볼리바르 혁명” 이라는 이름으로 반미 좌파적 포플리즘 정책을 실시했다. 반미투쟁 동맹전선을 구축한다며 이웃 나라들에게 석유를 공짜로 퍼주었다, 그는 그의 조국 베네수엘라 부(富)의 양극화와 부조리가 미국의 신자유주의 탓이라며 미국을 적으로 간주했다. 산업시설을 국유화하여 국부(國富)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인민의 복지”를 핑계로 마음껏 공짜 선심을 썼다. 그는 이 공짜 퍼주기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3세계를 대표한 위대한 저항으로 주장했다.
석유를 판돈으로 수 만 채의 집을 지어 공짜로 나누어 주기, 서민을 위한다며 물가통제하기, 소득성장 정책이라며 최저임금제 실시하기, 나라 돈으로 공공일자리 만들기 등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석유가 생명줄인 그 나라의 낡은 정유공장시설을 써 먹기만 할 뿐 정비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내 석유 정유 공장시설이 고장 낫지만 수리비가 없어 수리조차 할 수 없었다. 석유가격이 하락하고 생산량조차 극감하자 상황은 더욱 나쁘게 심화되었다.
통치자가 입맛대로 가격을 통제하면 시장이 무너지고, 입맛대로 최저임금을 올리면 사업체는 배겨나지 못해 파산하여 실업자는 늘어 날 것이다. 공공 일자리를 늘리면 그 만큼 민간일자리는 잠식당하여 민간실업이 만연할 것도 당연한 이치다. 이런 차베스의 얼치기 놀음을 보고 우리나라의 진보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몇 몇은 그들끼리 사이좋게 모여 앉아,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매우 위대한 실험이라고 다투어 극찬하며 매우 부러워했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차베스 같은 정치가가 없는 것을 크게 한탄했다. 이들은 차베스를 찬양하는 열띤 토론을 벌임으로서, 마치 문명의 예언자로서 그 예언이 실현되는 현장을 목격하는 목격자처럼, 그들의 그 특별난 지식을 자랑했다. 사실 이들은 이런 허구적 지식 놀음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위선적 집단에 불과하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공짜에 길들여지면 나태는 극에 달하고 비굴해진다. 국가가 주는 공짜는 결국에는 인민들의 근성까지 거지로 타락시킨다.
거지 근성은 공짜를 주면 먹이를 공급받은 돼지처럼 행복해한다. 인간으로서의 고아한 품성, 위대한 인성(人性) – 자존, 정의와 자유, 모험 – 은 사라진다. 그래서 통치자의 통치는 매우 쉬워진다.
타락한 정치권력은, 공공연히 인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서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인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소리 높여 약속한다. 그러나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는 그 특정 세력에 대하여 자기의 권력을 위임하는 행위이다. 지지를 요구하면서, 다시 말해 권력의 위임을 요구하며 권력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모순이다. 국가가 개인의 삶까지 책임지겠다고 할 때는 매우 위험한 권력이 된다.
타락한 정치권력은 인민을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 길들이는 실험에 열중한다. 그래서 인간의 원래적인 가치 – 독존적(獨尊的) 삶 – 보다는 정치사회적 삶을 강조한다.
국가가 당신의 삶을 책임진다면 – 그것이 가능하다면 – 당신은 자력갱생(自力更生)적 삶이 아닌 수혜자로서의 공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온 경험 중에 과연 진정한 “공짜”가 있던가.
공짜는 개인이 주는 것이건, 국가가 주는 것이건 영혼의 자유를 저당(抵當)으로 잡는다. 저당 잡힌 영혼은 저항과 선택의 자유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공짜를 주는 자는 반드시 무조건적 지지와 복종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민들이 공짜로 살아간다면, 나중에 나라가 거덜이 나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었기 때문이고, 공짜로 산 댓가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