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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學의 발원지” 합천 벽한정과 무민당 박인 (2) – 김무만 경영학 박사

Ⅱ. 南冥의 사숙제자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행적

무민당 박인은 1583년(선조 16년) 합천군 야로현 우계촌 외가에서 테어났다. 내암 정인홍이 외종숙이다. 조부는 충노(忠老)이며 조모는 광산김씨 림(琳)의 딸이다. 아버지는 수종(壽宗)이고 어머니는 서산정씨이다. 그리고 박인 4대조 순신(舜臣)의 맏형 우(宇)의 사위가 동계 정온(鄭蘊)의 6대조 정전준(鄭悛俊)이다. 박인의 사위는 의성인(義城人) 김극형(덕탄 김두남의 아들)이다. 1628년 남명의 아들 조차마(曺次磨)로부터 연원록과 연보의 찬술을 부탁받고 9년동안 노력 끝에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을 완료했다.1630년 58세로 학포 정훤(鄭暄)의 서재인 진양군 고산정사(孤山精舍)에서 별세했다. 무민당은 정훤의 두아들 스승이다. 박인은 벼슬은 하지 않고 평생 처사(處士)로 살았지만 당시 걸출한 인물들인 정온, 유진, 조임도, 임진부, 강대수, 이지분, 하홍도 등과 가깝게 교류했다.

  1.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 등의 편찬
    남명 사후 가장 활발하게 남명학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무민당 박인이다. 박인이 남명학파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은 오직 자신의 학문적 소양과 사우(師友)와의 인간관계가 원만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남명의 <연보>와 <언행록>을 찬(撰)하고 남명의 연원록인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인은 1628년 남명의 3자인 조차마의 촉탁을 받고 하홍도, 임진부, 조임도와 함께 <山海師友淵源錄>편찬하였다. 편찬하는 과정인 1634에는 동계 정온에게 편지하여 협조를 요청한 바 있고 1635년에는 정온이 편찬장소인 벽한정(碧寒亭.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소재)을 방문하여 직접 교열(校閱)을 하고 9년간의 긴 작업을 통해 1636년에 편찬을 완료했다.
    <山海師友淵源錄>은 남명에 관한 최초의 사우록으로 후에 함양의 남계서원에서 편찬한 <덕천사우연원록>의 모체가 되었다. <山海師友淵源錄>의 편찬은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를 결집하려는 자체적 노력이었으며, 박인이 이 연원록의 편찬을 총괄했다는 것은 경상우도의 여러 학자들로부터 신망도가 높고 남명학의 적통(嫡統) 계승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山海師友淵源錄>과 <남명언행록>, <남명연보>를 박인이 편찬을 주도한 것은 당시 경상우도에 정온, 조임도, 하홍도 등 쟁쟁한 인사들이 생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요한 사업을 박인에게 맡긴 것을 보면 박인의 학문적 자질과 남명의 학문과 처사적 삶을 철저하게 사숙(私淑)한 처사(處士)로 인정한 것으로 여겨 진다.
    박인이 과거를 단념하고 남명을 철저하게 사숙하게 된 단초(端初)는 남명이 1549년 거창 감악산을 오르면서 지었다는 칠언절구 “욕천(浴川)”에 나오는 “혹시라도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당장 배를 쪼개어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 라는 시구(詩句)를 읽고 척연감오(惕然感悟)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