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논단| “南冥學의 발원지” 합천 벽한정과 무민당 박인 (4) – 김무만 경영학 박사
1631년 49세 때 서애 유성룡의 3자 수암(修巖) 유진(柳袗. 1582-1635)이 합천군수로 부임하여 인사차 조동정사를 방문했다. 이때부터 유진과 박인은 수차례 만나고 편지를 주고 받는 등 교우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이후 유진이 박인을 “서호처사(西湖處士)”로 지칭하게 되면서 박인이 사림에서 처사로 지칭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호처사(西湖處士)”라는 구절이 나오는 유진의 아래 詩는 지금도 벽한정에 편액되어 있다. “서호(西湖)”는 당시 관아가 있는 군청 소재지에서 보면 서쪽에 박인이 살고 있다는 뜻이며, 지금은 조동(釣洞)앞이 대부분 논이지만 당시는 큰 늪(호수)였다.
來訪西湖處士居(래방서호처사거)
: 서호처사 사는 곳을 방문하니
林泉長物只圖書(임천장물지도서)
: 산중의 남은 것은 책뿐이더라
世間榮利何須道(세간영리하수도)
: 세간의 영리는 무엇을 말하랴
一點浮雲過太虛(일점부운과태허)
: 한점 뜬구름만 하늘에 떠가네
1634년에는 연원록 편찬과 관련하여 동계 정온에게 편지하여 협조를 요청했으며, 1635년에는 정온이 벽한정(당시는 용연재)을 방문했고 박인은 회연서원으로 가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를 배알했다.
1636년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을 완료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창의하여 아우 박위(朴緯)의 의병 진지에 참가했다. 1647년 인조가 강화(講和)하지 당호를 무민당(无悶堂)으로 개칭했다. 이듬해 1638년에는 아들 만(曼)과 함께 거창 모리재(某里齋)로 동계를 찾아 갔다. 1639년 벽한정을 준공하고 1640년 58세 10월 학포 정훤의 서재 고산정사에서 별세했다.12월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1641년 조임도, 임진부에 의해 행장(行狀)이 찬(撰)되었으며, 1662년 문인(門人)인 홍기범, 심일삼, 송필원 등에 의해 용연서원이 건립되었다. 1692년 용연서원에 대한 청액상소를 주채 등 영남생원 800여명이 하였으나 사액(賜額)을 받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