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홈

<괴운잡기> 삼대읍성(三大邑城)

권해조
논설위원

<괴운잡기> 삼대읍성(三大邑城)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곽(城廓)이 많았다. 그리고 고을 주민의 수에 따라 규모가 다르지만, 비교적 큰 고을과 해안근처에는 지방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을 담당하기 위한 읍성(邑城)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가 있었다고 나온다. 그 가운데 해미읍성, 낙안읍성, 고창읍성을 삼대읍성(三大邑城)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조선시대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들어졌다. 나는 얼마 전 고창읍성 방문을 끝으로 삼대읍성을 모두 방문하였다.
제일먼저 해미읍성(海美邑城)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곳이다. 해미(海美)란 지명은 ‘바다가 아름답다’란 의미로, 고려 때 정해면(貞海縣)과 여미현(余美縣)이 자리한 곳으로 각 현의 한 글자씩 따 해미현(海美縣)으로 지었다. 조선 초기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영을 1417년(태종 17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1651년(효종2년)에 청주로 옮기기까지 230여 년간 군사적 거점이었다. 이곳은 당시 육군의 최고지휘부인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배치되어 육군을 총 지휘한 곳으로, 1578년(선조11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하였고, 동학농민전쟁 때 내포지방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집결지였으며, 한말 의병들이 활동하였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 때 신도 1,000여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였다. 성곽둘레가 1,800m, 높이 5m, 면적 20만 평방미터이다. 1960년에 현존하는 표준 읍성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거쳐 1974년에는 남쪽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을 비롯하여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동헌(東軒), 사신들의 숙소인 객사(客舍), 병사들의 무예를 닦고 휴식하는 청허정(淸虛停) 등이 복원되었다.
다음은 낙안읍성(樂安邑城)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사적 302호로 지정된 곳이다. 1397년(태조 6년)에 처음 쌓았고, 1424년(세종실록)부터 몇 년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낙안읍성은 마한시대부터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백제시대는 파지성, 고려시대에부터는 낙안성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태조 때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했으나 1626년(인조4년) 임경업 장군이 돌로 쌓았다. 읍성은 남북310m 동서 460m의 4각형으로 성벽둘레는 1,410m 이다. 낙안읍성은 1466년(세조12년)부터 1910년까지 군청사가 있었던 고을로 동문, 서문, 남문과 관아, 옥사 등 건물이 있고 현재도 성내에 120세대가 실제 거주하는 국내유일한 읍성이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 생활 풍습과 문화를 알 수 있다. 해마다 5월에는 낙안민속축제가 열리고 10월에는 남도음식축제가 열린다. 최근 미국 CNN이 선정 한국 최고 여행지의 하나로 뽑힌 곳이다.
마지막으로 고창읍성(高敞邑城)이다. 전라북도 고창읍내리 산 9번지에 위치한 대한민국 사적 145호로 둘레 1,684m, 높이 3.6m의 자연석 성곽이다. 이 성은 조선조 세종말년부터 문종을 거쳐 단종원년인 1453년까지 8년 걸려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벽에는 제주시, 화순시, 나주시 등과 계유소축송지정(癸酉所築宋芝政)의 각명(刻銘)이 있어 축성을 위해 전라도 각 지역에서 역부(役夫)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창읍성은 동, 서, 북 3개 성문(城門)과 6개 치(雉: 성벽에 돌출시켜 쌓은 성), 그리고 2곳의 수구문과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있다. 또한 성 밖에는 독특한 형태로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과 성안에는 동헌, 객사 같은 22동의 관아 건물, 우물 4곳과 연못 2곳 등 행정, 군사 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그리고 당시 인접한 장성의 입암산성(笠岩山城)과 연계하여 서해안과 호남내륙을 노략질 하는 왜구를 막았으며, 이 지역이 백제시대 모양현(牟陽縣)이었기에 모양성(牟陽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고창읍성에서는 여자들이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성 밟기 풍습이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9일에 모양성제 축제를 열어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필자는 3대 읍성을 답방하고 수많은 외침에 시달렸던 선대들의 고통과 비운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특히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령 1호’로 우리역사의 상징인 관아와 성곽들을 모두 허물어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