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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어느 겨울날의 이른 아침 – 이호석 논설위원

며칠 전, 입춘과 설 명절이 지나갔다. 아침 5시경 잠이 깨였다. 아직도 집 안팎으로 사방이 어둑하다. 설을 쇠러 와 이틀을 쉬어간 아들, 며느리, 손자들의 왁자지껄한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집안이 조금은 허전하고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도둑놈이 남의 집안을 살피듯 창문을 살며시 조금 열고 바깥 동정을 살펴본다. 차가운 바람이 쏴 하고 얼굴을 때린다. 마을 골목 곳곳에서 추위에 떨며 서 있는 푸른 가로등 불빛이 칼날처럼 와 닿으며 내 마음을 더욱 차갑게 한다. 저 멀리 산 너머로 여명의 빛이 아슴푸레하다. 조금 멀리 있는 황강 건넛마을 뒷산이 꺼뭇하게 형체만 보인다. 황강 위로는 옅은 여명 속에 기러기 한 무리가 잠이 들깬 듯, 대오를 겨우 맞추어가며 날아가고 있다. 무슨 볼일이 있다고 새벽같이 이른 아침에 저렇게 날아가고 있을까. 밤사이 어디에서 자고는 물 맑고 먹잇감이 좋은 곳을 다른 무리보다 먼저 차지하려고 저렇게 바삐 가는 것일까. 아니면 밤중에 위에서 갑자기 부대 이동 명령이라도 내렸던 것일까?
시선을 조금 가까이로 옮긴다. 바로 앞집의 감나무가 꺼무튀튀한 몸뚱이를 들어낸 채 크고 작은 가지와 함께 찬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며 추위에 떨고 있고, 지붕 위에 내린 서리는 얼음으로 변해 엉겨 붙어 있는 것 같다. 또 옆집의 나무 보일러 연통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 나온다. 따뜻한 연통에서 빠져나온 연기는 바깥 추위에 깜짝 놀랐는지 하늘나라 어디론가 훨훨 도망질한다. 우리 집 마당의 소나무는 여름철 푸른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버텨서 있고, 마당의 잔디들도 노란 겨울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모두 추위에 떨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눈이 가는 곳마다 얼어붙고 추위에 떠는 모습에 갑자기 내 마음도 움찔 움츠려들어 자라 모가지가 들어가듯 후닥닥 창문을 닫아 버린다.
창문을 닫고 다시 잠자리에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찬바람을 들여 마셔 이미 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온갖 추억과 현실이 뒤범벅되어 기와집을 짓기 시작한다. 먼저 어릴 적 추억 속의 겨울이 떠오른다. 집 옆 도랑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타든 일, 설날 마을 집집을 돌며 어른들에게 세배하려 다니던 일, 가뭄에 먼지가 푸석푸석 날리는 논밭을 뛰어다니며 연을 날리던 일, 어린 형제들이 한 방에 기거하면서 잠자리에 들 때면 새까맣게 때가 묻은 이불을 서로 밀고 당기며 다투던 일,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가 형제들이 벗어 놓은 옷을 꿰매고, 이를 잡아주던 일 등 머릿속에서 옛 추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어제오늘의 현실이 겹친다. 어제 오전 합천시네마(소극장)에서 본 영화 ‘극한 직업’의 장면들이 잠시 떠오른다. 경찰 특수반원 5명이 마약범들을 잡으려는 눈물겨운 활동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였다. 갖은 고생 끝에 마약범들을 일망타진하고 일 계급씩 특진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된다. 또 오늘은 어느 친구를 만나 무엇을 할까. 점심은 뭘 먹을까. 잡다한 생각들이 앞뒤도 없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무래도 다시 잠 들기는 틀렸다.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일어나 불을 켰다. 잠시 전, 어둠 속에서 지어놓은 수십 채의 집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컴퓨터와 어지럽게 널린 책들이 오랜 친구들처럼 반가이 맞아준다. 역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이 친구들이 제일이다. 최근 창간되어 보내온 수필집 한 권을 펼쳤다. 산뜻한 표지와 목차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 남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적절한 단어로 아름다운 문장을 썼을까 싶어 부러울 때가 많다. 수필을 읽다보면 가끔은 그 사람의 당시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피식 웃기도 하고, 또 가끔은 작가의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정성을 다해 쓴 한편 한편이 모두 감동을 준다.
어느새 창밖이 훤하다. 벌써 8시가 다 되었다. 급히 아침밥을 챙겨 먹고, 집 옆에 있는 개집과 집 뒤 텃밭 모퉁이의 닭장을 찾아다니며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놈들에게 따뜻한 물과 먹이를 준다.
중천으로 떠오르는 따스한 햇볕이 겨울날의 이른 아침 얼어붙은 대지와 내 마음을 서서히 녹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