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 척 – 문경자 논설위원
2018년 11월 중순 영등포에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고향의 벗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같이 가는 벗 순이는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반면 열차안의 승객들은 무표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보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나가는 차창 밖 온갖 풍경들도 우리의 마음을 아는 듯이 손을 흔들어 환영해주었다. 그 속에는 타지에서 만난 무수한 친구들 얼굴도 따라왔다. 그 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내 곁에 있는 영희, 세상을 떠난 숙이 금희의 모습도 아련히 떠올랐다. 부산역이라는 큼직한 글자를 보기만 해도 반가웠다. 만남의 장소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송이, 진이를 만나 볼을 맞대는 순간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포항진이, 명지 송이, 부천에 순이, 서울에 깅자는 손을 꼭 잡고 역 근처 횟집으로 갔다. 식당 주인 여자는 친구들끼리 여행 왔나 봐요 하며 노릇하게 구운 생선접시를 놓고 갔다. 멸치대가리도 먹기 어려웠던 그때를 생각하며 생선머리에서 꼬리까지 세심하게 발라 먹었다. 해운대에 석양이 내리는 것을 보니 우리가 만난 시간도 꽤나 지났나 보다. 예약한 택시를 탔다. 광안대교 불빛이 우리를 유혹하는 밤. 길 거리 가수가 들려주는 노래에 맞추어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몸을 흔들고, 남녀가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우리도 흥에 겨워 그들과 함께 어울려 함께 친구가 되어 춤추었다. 밤이 깊어 지자 하나 둘 자리를 떠난 후 우리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걸었다. 부산이 고향은 아니지만 구수한 사투리에 고향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렇게 낯선 곳은 아니기에 편안하였다. 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과 한 조각의 구름도 반기는 듯 행복을 안겨주었다. 예약을 한 숙소에 들어와 밤이 새도록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 해운대 바닷물같이 파도가 치고 때로는 잔잔하고, 슬프고, 기쁘고 하는 삶의 짠 웃음도 버물려졌다. 호롱불 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낸 우리는 훤한 전깃불아래 그것도 푸른 LED 불빛이 더 좋았다. 순이는 부천에 살고 있는데 가끔 서울말을 한다. ‘우째 그라지, 너거들 밥 많이 묵었니’ 하면서 끝을 올린다. 그럴 때 마다 얼굴을 맞대고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눈치도 못 채고 계속했다. ‘너희들 와 그라니’ 하고 말을 한다. 친구들은 방바닥을 치면서 웃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순이에게 면박을 주거나 서울말 그렇게 한다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정겨운 고향 사투리가 함께 들어 있어 서다. 모두 행복한 순간이었다.
눈앞에 있어도 그리운 내 벗들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한시도 잊지못할 벗들이 오늘따라 다정하게 다가온다. 눈웃음을 치면서 깅자야 하고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서 달려오는 듯하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 마을 장식하고, 노랑나비 흰나비를 잡는다고 뛰어 놀던 뒷동산도 우리 놀이터였다. 뻐꾸기 울던 나른한 한 낮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유년시절 산골마을 초가집에서 살았다.
나도 그곳에서 어머니의 탯줄을 달고 나와 할머니가 분리시켰다. 그해는 딸들만 많이 태어났다. 내 벗 진이와 송이 순이도 줄줄이 복도없이 태어나 구박도 엄청나게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죄없는 검정고무신에 묻은 황토 흙을 탁탁 털었다. 붉은 색은 부정을 물리친다 하였다. 다음에는 고추를 달아 금줄을 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머슴아들하고 딱지치기, 숨바꼭질, 자치기 등을 하면서 키도 자라고 가슴도 봉숭아 꽃잎이 벌어지기 전의 봉우리처럼 하얀 런닝구 위로 솟았다. 꽃이 피는 봄이면 살구꽃처럼 볼그레한 얼굴, 여름이면 소나기 내리는 길을 마구 뛰어 철수네 담장아래서 쉬어 가기도 하고,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볏단을 지게에 지고가는 영춘이 어깨 근육이 궁금하고, 겨울이면 하얀 달빛아래 만나는 정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때였다.
벗들은 가난한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려고 하나 둘 도회지로 떠났다. 돈을 많이 벌어 부무에게 부쳐 주었다. 도시에서 살다 보니 시골티도 벗어 났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도 느낄 만큼 예쁘게 변하여 주위에 관심을 받았다. 순이도 송이도 진이도 회사와 집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가면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 모습을 본 부모들은 중매쟁이들을 앞세워 짝을 지어서 결혼을 시켰다. 부모들도 시집을 보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개운하다 하였다.
결혼을 하고 나니 벗들과 만날 일들이 없어 빌미를 만들어 내가 서둘러 전화를 했다. 고향에 가보자는 제안에 찬성한다는 뜻을 비추었다. 고향에 살고 있는 벗들의 어머니들께 드릴 선물은 갈치 두 마리 값을 넣은 2만원이 든 흰 봉투. 저녁 무렵 어머니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 다녔다. 대부분 혼자 살고 있었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고 방문을 활짝 열고 반겨 주었다. 빠글빠글 파마머리, 주름진 얼굴에 패인 힘든 삶, 전등불 아래 외로운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순이 엄마는 “너거들은 클 때도 뭉쳐 다니더니 시집을 가서도 안 떨어지고 꿀처럼 붙어 다니네. 못 먹고 못 입고 하던 너거들이 이제는 시집을 가더니 때깔이 훤하구나. 신랑들을 잘 만나서 이렇게 고향도 보내주고 친구들끼리 놀러 다니고 그만한 복이 최고다. 그래 세상에서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기라. 어릴 때 놀던 친구와 함께 고향을 찾아오는 길이 쉽지는 않을 낀데 부럽구나.” 라는 말을 하였다. 깅자, 송이, 진이, 순이도 모두 방글방글 웃으면 어린 시절의 아이로 되돌아 갔다. 하고 많은 생선 중에 하필이면 갈치였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려서 먹었을 때 가난했던 향수가 달콤함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만남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샘터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고향을 찾는 것도 좋지만 각자 시집을 가서 살고 있는 동네를 찾아 가기로 하였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진이가 살고 있는 포항이었다. 우리는 자랄 때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그저 황강에서 피래미나 잡았고, 돌 틈사이 가재를 잡고, 다슬기를 잡던 기억이 전부였다. 처음 그곳에 도착하여 수산물 시장을 돌면서 그저 환호성만 질렀다. 합천읍의 어물전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포항 영덕 대게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다리를 가진 게는 처음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친구 진이는 친정 오빠들이 올 때 마다 대게를 주문하는데 값이 무진장 비싸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어 군침만 삼켰다. 아직도 먹지 못한 대게가 눈 앞에 삼삼하다.
벗들과 부산에서 먹은 광어 한 마리 팔 만원. 회를 떠서 먹었는데 그날따라 내 배가 놀랐는지 파도 치는 것처럼 요동을 쳤다. 나물만 먹고 자라 대형 접시 네 개에 담겨있는 회를 보는 순간 눈알이 핑그르르 돌았다. 팽이가 돌아 가듯이 말이다. 그 눈으로 바라 보니 바로 앞 광안대교 불빛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벗들은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서 곤히 잠을 자는지. 벗들이 최고야 하고 나는 그들을 향해 엄지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