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듣다, 지역지킴이, 소상공업자(17)|묘산면 ‘중앙이발관’, “이발관 해서 자식들 공부 시키고 출가 시켰다”
10월 14일(월), 묘산면 교동에서 ‘중앙이발관’을 운영하는 조성래 사장(70세)을 만났다. 1967년부터 묘산에 있던 이발소에서 이발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이다. 여성인 기자도 초등학교까지는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았던 기억이 있으니 어지간한 묘산 사람들은 이곳을 다 거쳐 갔다고 보면 된다.
기자도 어린 시절엔 취학 전에는 마당에 보자기를 두르고 앉아 어머니께서 손수 머리를 깎여 주시다가 초등학교까지는 이발관, 중학교 들어가서야 미장원을 이용했다. 그 시절 합천 같은 곳에 살았던 우리 또래의 공통된 기억이다. 어떤 때는 이발사나 미용사가 직접 마을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을 회관이나 마당 넓은 집으로 집집마다 먹을거리를 들고 나와 나눠 먹으며 순서를 기다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묘산면에 이발관만 8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기와 교동, 두 군데만 남아 있다. 오늘은 조성래 사장의 견습 시절과 드라마에서나 보던 1960~70년대의 이발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당시는 수도가 없던 때라 근처 도랑에 물지게를 지고 가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물을 져 날랐다고 한다. 겨울엔 도랑의 얼음을 깨고 수건을 빨고 물을 나르기도 했다.
조성래 사장은 “물지게를 많이 져서 키가 많이 안 크지 않았나 싶다.”고 웃는다. 그는 묘산에서 신원으로 옮겨 3년 동안 같은 일을 하다가 군 제대 뒤 지금의 ‘중앙이발관’ 간판을 달고 독립하게 됐다. 지금은 이발관이든 미장원이든 뒤로 젖혀지는 편안한 의자를 사용하지만 그 때는 난로에 물을 데워 나무의자에 앉혀 머리를 감겼다고 한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연탄불이나 이발관 전용 석유곤로에 고데기를 지져 사용했는데 1970년대 후반쯤 묘산에 전기가 들어오고서야 드라이기도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는 이발하고 바로 이발비를 받는 게 아니라 ‘갈내기(가을내기)’라고 해서 6개월에 한 번씩 어른은 나락 한 말, 애들은 고봉 닷 되를 받았지. 6개월 동안 몇 번 머리를 깎든 상관없이 무조건 이렇게 받았는데 가을 수확이 끝나면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받았다.”
조성래 사장 얘기에 그러다 혹시 이발비를 못 받는 집도 있었냐고 여쭈니 나락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발비를 돈으로 받기 시작한 때가 1979년 쯤 된다고(당시 돈으로 어른 60원, 어린이는 30원.).
“지금은 인구도 줄고 애들도 미장원 가고…뭐 하겠노? 사람들이 여기 와서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찌개 내기 화투도 치고, 여기가 준 경로당이다. 이발관 하면서 자식들 공부에, 출가까지 다 시켰으니 이제 됐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 두고 아무것도 안 하기보다는)이 일이 정년이 없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조성래 사장은 합천군에 있는 이발사 가운데 나이 순으로 5위 안에 든다.
/박영수 시민기자
지역경제의 한 축을 든든히 맡고 있는 소상공업체를 찾아 그들의 경영철학과 애환,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바람을 듣는다.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