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욱(仁旭) 최상천 탄생 1백주년에 붙여 (3) – 안병국 교수
2-2 『임꺽정(林巨正)』
인욱 상천의 또 하나 작품으로 ‘임꺽정(林巨正)’(1962)이 있다. 전 5권, 교문사에서 출판했다. 특히 이 작품은 신문연재소설인데, 왜 ‘전작장편’이란 말을 쓰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미리 써 놓고 발표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출판은 신문연재가 끝난 그해 1965년이다. 이 소설을 두고 “사실에 충실한 역사의 재현과 심화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벽초 홍명희의 동명 소설 〈임꺽정〉(1939)’과의 관련은 어쩔 수가 없다.
벽초(碧初, 홍명희)의 ‘임꺽정’은 조선 후기의 민중의식의 대두를 배경으로 풍속의 재현에 힘썼던 대표적 저작물이다. 이 작품은 연산군시대와 명종시대에 이르는 16세기 중반 전후의 조선 중기의 역사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창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봉건적 질곡을 뚫고 일어선 평민 이하 하층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근대 역사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인욱 상천의 ‘임꺽정’은 벽초의 동명의 제목을 차운한 것같은 결점이 없지 않으나, 제대로 환골탈태시킨 것이어서 벽초의 것보다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월북한 거물 정치인으로 조선 3대 천재의 1인으로 평가받았던 벽초, 그의 작품을 읽지 못했던 독자들에게는 인욱 상천의 소설은 제목부터가 흥미이자 충격이기도 했다. 1962년에서 1965년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소설의 연재가 끝나자 신문 판매부수가 2만부나 떨어졌다 한다.
1970년대 말, 인문학 전공자에게 벽초의 작품은 발표당시 신문 글을 사진으로 찍어 제본한 것이 비밀리에 유통되기도 했다. 필자가 공부한 학교 시계탑 건물에 ‘중앙연구소’라는 연구소에 ‘성암’이라는 호를 가진 서지학자가 계셨다. 도서관과 달리 인문학 서적만을 요령있게 분류하여 갖추어 놓았는데 인문학 전공자들이 아주 편하게 이용했다. 거기 우리 원생 나이 또래 연구원이 조선일보 신문에 발표했던 벽초의 소설을 사진으로 찍어 유통시켰다. 지금 도서출판사인 ‘사계절’의 인쇄물을 생각한다면 자형이 좋지 못해 가독하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당시 대학원생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데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우리는 두 작가의 작품을 두고 비교하기도 했다. 서림의 배신을 두고 찬·반으로 이견이 있었고, 어학 전공의 젊은 원생들은 작중에 종횡무진하는 토속어가, 지금 우리가 되살려야 하는 민족어라는 지적에 의미있다고 동감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면산 밑에 있는 주점 ‘청석골’에 출입하면서 술값 할인을 받기도 했고, ‘한 병 더’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번역서 3편
3-1 『고문진보』
번역본 ‘고문진보’와 ‘사기열전’, 그리고 ‘요재지이’에 관해서다. 한문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교과서의 역할을 해 온 ‘고문진보’는 해방 이후 선생이 출판사 을유문화사(1964년)를 통해 처음으로 번역·출판하었다.
아는 대로 ‘고문진보’는 13세기 말(1275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한문으로 된 시나 문을 배우는 초학자들의 필독서였다. 중국인에 의하여 ‘중국인의 글’을 모은 것이라는 한계성으로 인하여 비판적 견해가 없지는 않지만 한문 공부를 하는 사람치고 이 ‘고문진보’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기의 뜻을 문장으로 드러내려면 옛 명문을 모아놓은 이 책을 읽어야 하고, 이를 수백 번 몸에 배고 체화되어야 된다 했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고문진보’를 문장공부의 금과옥조처럼 중시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왕이 참여한 경연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우리의 언어로는 그토록 오랜 후에 번역되었다니 이해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인욱 상천 선생은 ‘고문진보’ 서문에서 “역자는 어릴 적에 스승을 쫓아 고문의 일부를 학습한 바 있어 그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라고 술회하였다. 우리 고향의 한학 전통의 연원을 장식하는 학자분들이 누구였을까도 흥미꺼리일 수 있다. 우리 고향은 ‘문향(文鄕)’이라 할 만큼 한문학의 경험이 축적된 곳이어서 새로운 내용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금의 ‘고문진보’는 몇 분의 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 대표적 번역본은 성백효의 ‘고문진보’(전통문화연구회본 : 1994, 10)가 있고, 김학주의 번역본(명문당 ; 2005. 1), 훨씬 앞선 1978년 송정희·한무희 본, 그리고 최고라 일컬어지는 이장우 교수가 두 후배와 함께 번역한 을유문화사(2001년) 본이 있다. 그런데 이장우 교수의 번역본 외 어떤 번역본도 인욱 상천의 번역본을 참고했다고 말한 이가 없다. 이 교수는 “(이전의 여러 번역본이)이 대개가 최인욱 선생의 번역본을 ‘모방’한 데다…”라 하여 여타 다른 번역가들이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을 혼자만 자신의 번역서 머리에다 밝혔다.
어떤 저서고 간에 선학이 축적해 둔 경험을 참고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저작품, 특히 번역작이나 논문들이 자기가 처음을 쓴 것인양 우기는 바람에 표절이라는 악습이 횡행하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ky.)”라는 성경의 전도서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한다.
3-2 『사기열전』
인욱 상천의 ‘사기열전’(1965)은 『사기』의 ‘열전(列傳)’ 70편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번역’한 초역(抄譯)이다. 현암사에서 출판되었다. ‘사기’라는 이름의 번역작으로는 우리나라 최초가 된다. 그런데 인욱 상천의 연보나 한국의 문학사전에 어디에도 이 ‘사기’ 번역에 관한 언급이 없다.
사마천의 ‘사기’는 52만 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이자 인간학의 보고다. 문장가 유종원은 ‘사기’를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나다”고 평가했고, 노신(魯迅)은 “절창이면서 운율없는 이소(離騷)”라고 했다.
거세의 형벌인 ‘부형’이라는 삶의 가혹한 조건 속에서 탄생한 인간 승리의 작품이고, 행간에는 깊은 생각의 단초들이 녹아 있다. 일본인 학자 무전태순은 그의 〈사마천 사기의 세계(司馬遷 ; 史記の世界)〉에서 ‘사기’라는 책으로 남아있는 것을 ‘인간의 집념’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집념이 얼마나 강인한가를 보여준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사기’에 관한 수많은 언급이 있지만 인욱 상천은 “중국의 전적이 황하·폭포와 같이 많으나 그 근원은 육경에 더할 것이 없고 역사를 밝혀 아는 데는 ‘사기’를 덮은 것이 없다”고 해제에서 쓰고 있다. 정범진 교수가 성균관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도서출판 ‘까치’에서 출간한 전 7권의 ‘사기’는 완역본이다. 그는 7권째 후기에서 “약 2년 반에 걸친 ‘사기’의 번역작업이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말하고, 동원된 인원은 ‘60여 명’이라고 하였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이 다음이다. “그러나 본서의 ‘열전’을 제외한 부분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번역작업’이었고…”라 썼다. 자못 감격적인 말이긴 하다. 날짜는 1992년 12월이라고 하였다.
‘혼자서’ 한 이는 김원중 교수다. “개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사기’ 전체를 완역했다(2011년에)”고 말하면서, 특히 김 교수는 ‘개인’이라는 말을 강조하였다, 그 사실은 그가 정범진 교수의 문하생으로 구성된 단원의 일원으로서 ‘여태후본기’·‘사마상여열전’·‘상군열전’·‘소진열전’ 등을 번역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말처럼 16년에 걸쳐 독자적이자 개인적 소망차원에서 ‘최초’로 완역한 것은 칭찬해도 부족함은 없다. 16년이면 적잖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힘을 합쳐 나누어서 번역한지로 20년 후에 ‘개인의 번역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