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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수사원(飮水思源) – 임장섭 전 합천교육장

사람이 먼저다. 한때 이런 말이 많이 회자되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사람사는 세상에 사람이 우선이고 소중하다는 뜻일 것이다. 어느 집단, 어떤 지역에 어떤 사람이 나고 사느냐를 두고 그 단체나 지역을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인구가 많지 않고 변방일지라도 인물이 나면 명품지역으로 보는 것이다. 산불재고 유선즉명(山不在高 有仙則名)이라하지 않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듯이 말이다. 우리 고장은 예부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아름다운 명품지역이다.
아름다운 우리 지역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고, 희망의 바이러스를 전파시킨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MB정부시절 초대 기획재정부장관을 지낸 강만수씨다.
서울법대를 나와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주미국대사관 재무관, 재무부 보험국장,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재정경제원 세제실 실장, 제14대 관세청 청장, 제3대 통상산업부 차관, 제4대 재정경제원 차관,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제9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원장,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1분과위 간사, 기획재정부장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산은금융그룹 회장, 한국산업운행 은행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가 고향 및 인근지역을 위한 사업은 ①김천-거제 간 남부내륙 고속철도 건설계획 및 김천-진주간 고속철도역 합천읍 근린에 역사를 추진시킨 장본인이며 ②군산-울산(함양-울산)간 고속도로건설을 성사시켰으며 ③쌍림-고령간(국도26호)4차선 완공(조기 준공될 수 있게 사업비 지원). ④고령-성주 국도 건설사업(33호)을 조기 준공될 수 있도록 사업비지원하고 ⑤국지도 67호선 확장사업(조기 준공 위한 지원) ⑥88고속국도 전구간 확포장, 선형개량 등 동시착공, 동시준공을 위해 대통령께 건의 추진했다.(88고속도는 2차선으로 사고가 빈번하여 죽음의 고속도로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숙원사업이었다.) ⑦합천읍-임북리 방향 교량건설을 추진하여 그간 동부권과의 불편한 교통을 해소했으며 ⑧황계리(황계폭포 위) 소재 농업용수 담수 댐, 보수지원 외 부지기수다. 또 황강취수장 폐기에 큰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반에 부산-경남상수도 취수장설치 문제로 합천사람들이 사생결단으로 취수장 반대데모를 하였다. 취수장이 설치되면 소-돼지사육과 농사용 농약살포도 할 수 없는 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 때문에 많은 군민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경운기, 트렉터 등을 동원해 데모를 거칠게 하였는데, 그때 어느 경찰관은 “우리가 전국적으로 데모진압에 동원되었지만 합천만큼 격렬한 데모는 없었다”고 할 만큼 대단했다. 그즈음 강만수 차관이 고향을 찾아 취수장관련 이야기를 듣고. 상경하여 강 차관이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취수장 반대의 절실함을 설명하고 준비한 자료를 건네주었다. 김 비서실장은 김영삼 대통령께 황강취수장 설치의 부당성을 보고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당시 강 차관과 김 비서실장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掘井之人)’, ‘우물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의 공을 생각한다’는 말처럼 감사하고 잊지 않아야 한다.
재경부차관 이후에 공직을 떠난 10년만인 2008년2월 MB정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컴백한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서길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세제개혁, 규제완화, 통화스왑체결(외환정책), 공기업개혁 등’ 그가 일한 1년이 다른 장관 10년에 필적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오랜 인연을 들어 ‘역대최강의 실세장관’ ‘킹만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획재정부장관시절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가 추진해 관철시킨 정책들은 재평가를 받는다. 그가 떠나고 경제에 햇살이 비치자 경제전문가 중에 강만수 팀의 ‘기민한 대응’을 경제회복의 성과로 꼽지 않은 이는 드물다. 무수한 비난에도 한번 결정한 일은 뒤돌아보지도, 물러서지도 않았기에 그를 ‘강고집’이라고도 했다. 그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것이 ‘인간 강만수’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는 신속하고 과감한 재정확대와 환율실세화가 한국경제를 ‘기대 이상의 회복’으로 이끌어 시장을 놀라게 했고, 다른 나라에 주목을 받았다. 그 시절 그가 ‘지금 세계는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자가 되는 생존게임’이다 는 말은 인상적이었다. 살아남아 강자가 되려면 ‘환율모멘텀을 살리고, 감세와 지출확대 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부동산문제는 기본적으로 선별적인 금융정책을 통해 대응해야 한다. 부동산은 전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지적인 문제다. 원인을 따져보면 과잉유동성보다 더 깊은 ‘교육문제’가 달려 있다. 교육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부동산을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선진국 진입은 결국 국가경쟁력을 막고 있는 “불확실한 법의 지배, 전투적인 노사관계, 흔들리는 다수결, 이 세가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세계경제의 더블딥(double dip; 경기가 반짝 상승한 후에 다시 침체하는 현상) 가능성을 제기하며, 시중에 돈을 푸는 재정확장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오랜 전문적 경력에서 나온 능력이다.
그는 인격이란 그릇이 큰 인물이다. 그는 소탈하며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그래서 고향을 자주 찾는 편이다. 휴가는 고향에서 보낸다. 먼저 선산과 재실을 찾고 숙부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드리고 고향집에서 지인, 후배들과 정담을 나누기를 좋아한다. 후배가 인사차 찾아오면 앉아서 맞이하는 경우가 없다. 그들이 떠날 때도 대문까지 나가서 배웅을 한다. 모교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격려의 말과 학용품들을 전달하곤 하였다. 고사리 같은 어린 학생들의 손 편지를 받고는 일일이 답장을 하고 편지를 보물처럼 보관하는 일들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흔히 성공한 여느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는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권력에 취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대화는 전문적이거나 어려운 용어가 없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지역의 역사가 주류가 된다. 초등학교시절 흙바닥교실에 가마니를 깔고 수업 받던 일, 쏭구죽과 보리깜부기 먹으며 서로 까맣게 얼룩진 얼굴을 보며 웃던 얘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나는 요즘 그가 눈물겹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