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운잡기| 동방오현(東方五賢) 묘소 참배 – 권해조 논설위원
얼마 전 지인의 안내로 조광조(趙光祖) 묘소와 사당을 찾아 참배함으로써 지난 3년간 동방오현(東方五賢)의 묘소를 모두 참배하였다. 동방5현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에서 공인한 최고의 정신적 지주에 오른 유학자로서 성균관 대성전 문묘(文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된 동방18현 가운데서 조선 전.중기(1450-1570년대)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으로 1610년(광해군2년)에 문묘에 종사 되었다.
먼저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字)는 대유(大猷), 호(號)는 사옹(蓑翁), 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의영고사(義盈庫使) 김소형(金小亨)의 손자로,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뉴(金紐)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한양 정릉에서 태어나 근기(近畿)지방 성남. 미원(迷原)등지에 기반을 갖고 있었고, 영남지방의 현풍, 합천야로(처가), 성주(처외가)등에서 사류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소학(小學)>에 심취해서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와 1517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학문적으로 정몽주, 길재,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문묘 동배향 제3위에 배향(配享)되고, 묘소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부인, 넷째아들 손자와 함께 있다. 안산의 인산(仁山)서원, 서흥 화곡花谷)서원, 희천 상형(象賢)서원, 순천 옥천(玉川)서원 현풍 도동(道東)서원 등에 제향(祭享)되었고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 한원당집, 가범(家範)등이 있다.
다음은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논어(論語>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탐구에 열중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 유생이 되어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소격서(昭格署)참봉이 되었다. 성종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1495(연산군1)에 안음(安陰)현감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사망 뒤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문묘 서배향 제3위에 배향되고, 묘소는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부인 정경부인 완산이씨와 함께 있다. 나주 경현(景賢)서원, 상주 도남(道南)서원, 함양 남계(濫溪)서원, 합천 이연(伊淵)서원, 거창 도산(道山)서원, 종산(鍾山) 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다음은 이번에 답사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사람파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 갑자시화(연산군 10)때 유배 몸이 되었으나 학문에 전념했다. 1510년(중종5) 사마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은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를 펼쳤다. 이에 불만을 가진 훈구파인 예조판서 남곤(南袞),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모의하여 탄핵을 건의하여 중종은 1519년 조광조 등을 투옥하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사(賜死)되였다. 문묘 동배향 제4위에 배향되고, 묘소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으며 부근에 1650년(효종1년)에 지방 유림들이 심곡(深谷)서원이 세워졌다. 능주 죽수(竹樹)서원, 양주 도봉(道峰)서원, 희천 양현사(兩賢司) 등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다음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다. 경북 경주출신으로 본관은 여강(驪江: 驪州)이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514년(중종9)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에 사간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 물러나 경주 지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후에 1537년 홍문관교 직제학을 거쳐 전주부윤,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1)에 좌찬성이 되었다. 1547년 윤형원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문묘 서배향 제4위에 배향되고, 묘소는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에 있다. 경주의 옥산(玉山)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술로는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황( 李況: 1501-1570)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1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부친을 잃고 숙부 이우(李堣)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1523년(중종18)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1528년 진사,1534년 식년문과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등을 거쳐 형조좌랑.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사직되었다가 1552년 대사상에 재임되어 형조참의, 부제학을 거쳐 1568년(선조1) 우찬성을 거처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은퇴하여 고향에서 학무과 교육에 전념하다가 별세했다. 그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학풍은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등에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의 학덕은 한일양국의 역사에 크게 선양하였고 오늘날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되고 있다.
문묘 동배향 제5위에 배향되고,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 이황은 43세에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하여 학문이 심화되었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58세때 주자서절요, 자성록, 68세때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상서했으며, 1568년 만년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헌상하였다.
옛 말에 정승(政丞)10명이 죽은 대제학(大提學)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종사(文廟從祀)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묘종사 현인(賢人)은 가문이 좋거나 벼슬이 높다고 선정되는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며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고 학자와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선정되었다. 이번 조광조 유택 참배를 마지막으로 동방5현의 유택을 모두 참배함으로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진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