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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서번트리드십 (2) – 변명규 논설위원

리더십에는 조직의 앞에 서서 이끄는 전통적인 리더십과 사람 중심의 수평적 리더십이 있다. 전통적 리더십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전형적인 리더의 일반화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지금도 많은 조직에서 전통적 리더십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비해 리더가 조직 속에서 경청하고 공감하며 섬기는 리더십이 있는데 이를 현대적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을 ‘서번트리더십’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앞에서 소설 속 레오가 보여준 활동이 그런 리더인 것이다. 우리말로 달리 표현하자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조직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조직 속의 개인 경쟁이 있고, 조직과 조직 간의 경쟁이 있다. 문제는 조직 전체가 타 조직과의 경쟁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직 간의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거나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조직 속의 개인별 경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조직원 전체가 리더라는 생각으로 서로 협력하고 모든 노하우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회사의 조직 구조에서 과장, 상무, 전무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팀이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직인 이상 누구나 대표격인 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에서 팀장이라는 이름으로 대표격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가 조직의 리더를 해야 하는 것이다. 리더이긴 하되 팀 앞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팀원의 한 사람으로서, 팀 속에서 모든 업무를 같이 연구하고 같이 추진하는 수평적인 리더인 것이다. 이런 리더가 곧 서번트리더십인 것이다.
이 서번트 리드십을 발휘한 사람들은 참으로 많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직원들 속에서 그들과 생활을 같이하며 모든 일을 공유하고 의논하고 소통하여 해결해 나갔다. 나는 서번트리더로 훌륭했던 사람들 중에 5세기 전(16세기)의 이순신 장군을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꼽고 싶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모든 것이 권위주위적이고 상명하복이 당연한 체계였고, 상사의 명령이 곧 법이었던 시기다. 그 시기에 이순신은 한 인간으로서 한 병사로서 한 장군으로서 한 국민으로서 그야말로 공고동락의 서번트리드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45전 40승 5무(자료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음)라는 전승의 기록이 아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을 맞이한 이순신 장군의 활동상 몇 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리더십을 이해할 수 있다.

1)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 조선 수군에 남은 것은 판옥선 12척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선조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했다. 그리고 수군이 너무 약하니 폐지 시키고 육군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으로 막아 지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중략).”
극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12척밖에 없다’가 아니라 ‘아직 12척이 있다’ 죽을힘을 다하면 오히려 해낼 수 있다.고 했다.
맑았다.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생간의 노비 집에 도착했더니 조카 봉과 분, 아들 울과 윤사행, 원경이 한방에 앉아 있었다. 오래 이야기했다. (중략) 술에 취했고, 땀으로 몸이 젖었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일>
28일 동안 감옥에서 죽음이냐 삶이냐의 갈림길에서 풀려나 첫 기록이 ‘맑았다. 옥문을 나왔다’이다. 자신의 고통을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전장의 최일선에서 나라를 기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조정 대신과 왕은 그를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 했는데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분노, 절망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앞날을 위한 걱정에 마음 아파했다.

2) 소통하고 솔선수범하고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장수였다.
약속과 중의를 모아 결정의 자료로 활용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관할구역 밖인 경상도로 출전할지 여부를 놓고 부하들과 토론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하들은 출전을 주장한반면 낙안군수는 반대하고 나섰다. 이순신은 자신의 의견을 먼저 주장하려 들지 않았고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결정권을 가진 리더였지만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설득하려 노력했다. 이런 회의 광경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종종 나타난다. 장군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과 동행하는 리더였던 것이다. 부하들과 通해야 이긴다.
이순신 장군은 위기의 상황에서 언제나 앞장서 싸웠다. 절대 열세의 해전인 명량해전에서는 대부분의 장수들이 회피하려 할 때 사령관 격인 삼도수군통제사가 탄 배가 제일 앞장서서 싸워 적의 예기를 차단했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사부들과 뱃전에 나란히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그런 지휘관의 모습은 부하들의 신뢰와 용기를 끌어냈다.
“당초 약속할 때 비록 적의 머리를 베지 못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운 자를 1등으로 한다고 약속하였으므로 신이 직접 등급을 결정해 1등으로 기록했습니다.”(1592년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박녹수, 김희수가 와서 적의 정황을 말해주므로 각각 무명 한 필을 주어 보냈다.”< 난중일기. 1595년 9월23일>
이순신은 공을 세운 부하 장수와 군사에게는 그에 적합한 상을 주었다. 심지어 적의 정보를 갖고 온 백성에게도 상을 주었다. 부하 장수가 합당한 상을 받지 못할 경우 따로 장계를 올려 포상해달라고 했다.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3) 투철한 애국, 애민의 정신이 강철같은 신뢰로 이어졌다.
전쟁의 영웅들 그들은 대부분이 복수, 정복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정복,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침략자에 맞서 자신들이 태어나 살고 있는 땅,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지켜야 했다. 이순신과 그의 군사들은 조국과 백성의 생존을 책임진 애국심과 애민심으로 뭉첬고, 자신들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기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대의를 위한 참된 리더십인 것이다.
이순신은 상벌을 엄하게 적용했다. 명령을 어긴자나 임무에 충실치 못한 자는 즉각 상응하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고, 큰 공은 국가에 장계를 올려 포상을 관철하기도 했다. 평소 엄격하고 무섭기 그지없던 최고 지휘관 이순신 덕분에 왕으로부터 상을 받게 된다면 그 부하들의 어떻게 처신했을까?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장계에 부상자와 전사자도 낱낱이 보고하고 있다. 비록 그가 노비 출신이라 하더라도 ‘아무개 집 종 누구’ 이런 식으로 보고를 했다. 또한 전사자는 그 가족이 가까이 살고 있으면 비록 부족하지만 먹고살 방도를 취해주었다. 군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장으로 나가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순신이 신뢰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이순신 리더십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신뢰였다. 조선 백성은 조선 수군을 믿었다. 우리 수군은 지지 않는다. 그래서 백성은 군량미를 바쳤고 힘든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이순신을 믿었다. 장군과 함께라면 지지 않을뿐더러 올린 전과와 전공을 꼬박꼬박 챙겨준다. 바로 이 신뢰가 조선 수군의 힘이었다.

4) 군량확보, 굶주린 백성을 위한 둔전경영
이순신은 북방에서 근무할 때 둔전을 경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라좌수영, 삼도수군통제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국가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조선 군인의 전투력이나 군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이순신은 둔전정책을 펼쳐나갔다. 둔전을 설치해야 하는 이유, 장소, 경작자, 관리감독, 농사 시기, 농기구 조달, 소득분배 등 세세한 내용까지도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둔전경영은 오로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휼하는 목적으로도 활용했으니 그야말로 구국애민의 정책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