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서원(晦山書院)의 위치에 대한 소고 (1) -최상호 유림회장
회산서원(晦山書院)은 남명(南冥) 선생이 1572년 2월8일 역책(易簀:증자가 죽을 때를 당하여 삿자리를 바꾸었다는 옛일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하시자 후학(後學)들이 1576년 선조9년 회현(晦峴)에 회산서원(晦山書院)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회현(晦峴)의 위치를 가회면(佳會面) 내사(內沙)부락 사우실(祠宇室)이라고 하고, 또 가회면(佳會面) 장대리(將臺里)라고도 하여 회산서원의 위치가 사람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달라 이를 확실히 할 사료(史料)를 확인(確認)하여 진실을 밝혀 주장의 통일을 기하고자 한다.
*회산서원(晦山書院) 건립의 위치에 관한 기록
- 회산서원은 1576년(선조9) 노흠(盧欽/삼가거주), 송희창(宋希昌/대병거주) 등 여러 선비가 논의하여 삼가현(三嘉縣) 서쪽 20리 남짓 회현晦峴(망현網峴, 화지현花旨峴 등 고지도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음)
-용암서원지(龍巖書院誌) P31. - 송정 하수일(松亭 河受一; 명종8년1553 ~ 광해4년1612)이 쓴 송정집(1788년 후손 正中의 초간본, 1939년 후손 宗根이 속집續集과 연보年譜를 합쳐 원집原集 5권. 속집續集 연보 3권. 합4책. 한국고전번역원)의 연보年譜에 선조15년 임오10월 陪覺齋先生 往晦山書院 奉安南冥先生位版 遊黃溪(嘉人士新建書院於晦山 盖以南冥舊鄕也 覺齋時以德川山長 兼晦山山長 奉安位版 先生往從之爲執禮 翌日觀黃溪瀑布
- 1593년(선조15), 임란壬亂으로 소실燒失되자 1601년(선조34년) 회산서원 복원하고저 하였으나, 터가 협소하여 송희창(宋希昌/대병거주), 문경호(文景虎/야로거주), 조응인(曺應仁/합천거주) 등 여러 선비가 논의하여 봉산면(鳳山面) 황강(黃江) 앞에 향천서원(香川書院)으로 중건(重建).
*상기 기록의 해석 - 위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제 1항의 현(縣). 서쪽 20일족 20里 남짓이라 함은 사우실(祠宇室) 위치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고(세종지리지에 삼가현에서 가회까지는 40리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동(枝洞)에서 가회(佳會)까지의 중간지점).
그리고 조선시대의 사우실(祠宇室)은 가회(佳會), 삼가(三嘉), 대병(大幷), 쌍백(雙栢), 봉산(鳳山), 거창(居昌), 신원(新院)로 통행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새로 생긴 신작로(新作路)는 1927년에 착공하여 5년 가까이 암벽(岩壁) 등 난공사 구간이 있어서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932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출신인 윤익현(尹翼鉉, 당시 25세) 면장이 예산을 특배特配받아 진주 소재 토목회사 죽본조(竹本組)가 3480원에 낙찰되어 완공하였다.(1932년 동아일보 기사 참조)
그러므로 당시의 교통 시설 즉 도로를 오늘날 차도로 생각하면 엄청난 오류(誤謬)를 범할 수 있다. 특히 가회(佳會) 장대(將臺)는 위치상으로 보아 현縣의 중심中心을 벗어났고, 가회 이외의 5개면 지역의 유생(儒生)들이 통행하기 어려운 지역이며 또한 서원건립 추진인사가 가회인(佳會人)이 아니었음을 유념하고 이 사안을 보아야 한다. 당시 서원과 관련된 인사의 거주지를 보면, 야로冶爐, 고령高靈, 초계草溪, 합천陜川, 삼가三嘉, 영산靈山, 안의安義, 성주星州, 산청山淸, 솔례率禮 , 함안咸安, 안음安陰, 거창居昌, 단성丹城 등지인데 굳이 가회佳會 장대將臺에 서원書院을 지었겠는가? - 상기 제 2항에 삼가인사(三嘉人士)가 회현晦峴에 새로 서원書院을 지었는데, “盖以南冥舊鄕也개이남명구향야”라 하였다. 남명南冥의 구향舊鄕이라 함은 남명의 선대가 살던 지동(枝洞)을 말하며, ‘盖以개이’라는 말은 ‘거의 가까운 곳’을 뜻함인데, 지동枝洞과 사우실祠宇室은 10리가 채 안될 정도이다. 그러므로 회산서원을 건립할 때 남명 선생의 선대가 살던 지동枝洞에서 가깝고, 또 유생儒生들의 접근성이 좋은 사우실祠宇室로 보아야 한다. 가회佳會 장대將臺에 건립建立하면서 “盖以南冥舊鄕也”라고는 쓸 수는 없다.
- 상기 3항의 이건 이유는 장소가 협소하다고 하였는데 창건 당시와 비교하면 유생儒生의 수數가 증가되어 수용의 한계가 초월되어 확장의 필요성이 있으나 확장할 지리적 요건이 충족되지 못한, 좁고 경사진 지형이다. 장대將臺의 서원유지(書院遺址)는 협소狹小해서 자리를 봉산면 봉계리(鳳山面 鳳界里)로 옮길 정도로 협소한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