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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강이 흐르는 고향 – 이현철

교가(校歌)들이 가진 공통점은 가사에 대부분 학교 주변 지역에 이름난 산과 강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산지가 태반이 넘는 우리 국토의 특징상 차가운 북풍을 차단해 주는 산과 생명의 근원인 물을 주는 강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삶을 풍성하게 하므로 이들이 취락(聚落) 형성의 중요 조건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삼가(三嘉)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동문님들은 ‘장려한 자굴산(藉堀山)의 정기를 타고…’로 시작하여 ‘기양루(岐陽樓), 사들’ 그리고 후렴(後斂)의 ‘양천(陽川)강 흐르는 물 용솟음칠 때…’로 이어지는 교가를 기억할 것이다. 자굴산이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사이로 태고적에 발원(發源)하여 역사와 같이 흘러온 양천이 남강 상류의 한 지류에 해당하는 조용한 강물이지만 어쩌다 홍수를 일으키며 무서운 기세로 흐를 때 미상불(未嘗不) 용솟음치며 모든 것을 쓸어갈 듯 노도(怒濤)의 강이 되는 것을 여기서 자란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양천이 논밭을 적시며 흐르는 고향 삼가에 옛 유적으로 남은 기양루 일대를 정비한다는 소식을 고향 친구들을 통해 듣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누각 중 기양루가 합천 일대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성내(城內)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리기 위해 북을 울리는 곳이었다고 하니 이는 ‘-루(樓)’란 옛 건축물의 전형적(典型的) 용도 범주(範疇)를 벗어난다. 방백(方伯)의 회합이나 주로 연회를 위한 곳으로만 사용됐을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을 초월한 것이다. 북소리로 시각을 알려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한 점에서 긴 세월 볕 바래어 수수한 모습임에도 백성들의 삶에 이바지한 고기능(高機能)성 건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뒤편에는 현감(縣監)이 목민(牧民)하던 관아(官衙) 동헌(東軒)이 있었고 육이오 사변 전 빨치산이 방화하여 소실(燒失)됐다는 객사(客舍), 수정강, 동문, 서문, 홍살문(紅箭門), 옥 골목, 성 밖 동네, 향교, 삼가 토성 등 지금 흔적이 사라졌으나 그 이름들이 지칭(指稱)하는 장소를 아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생존해계시리라.
옛 모습이 모두 복원되는 정비사업은 아닐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삼가가 지닌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임하기를 바랄 뿐이다.
삼가에서 자란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백학산 성터란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 삼가중학교 앞 백학산 정상에 올라보면 성터라기보다 퇴색한 돌무더기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의도한 바가 뭔지 알 수 없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어 이 무거운 바위들을 누가 언제 왜 가져다 이곳에 두었을까 궁금했었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다 보니 백학산 성터에 대한 궁금증도 잊고 지내왔는데 서애(西厓)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읽을 기회가 있어 살피던 중 그 속에 삼가(三嘉)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 성터에 관한 일말(一抹)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짧게 남은 옛 문헌 내용의 전제(前提)와 함의(含意)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 조정은 왜의 침략을 우려하여 변방의 사정을 잘 아는 신하를 뽑아 충청 경상 전라 삼도를 순찰하고 방비케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경상도에 관찰사를 임명하여 병기를 갖추고 성과 해자(垓子)를 손보게 하는 등 많은 성을 쌓았는데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등 좌우 병영에 속한 지역의 성을 새로 쌓거나 더 높이 쌓았다. 삼가는 낙동강을 타고 배편으로 진출할 왜군을 막기 위한 방어선으로 의령 정암진 넘어 이곳에 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나라 밖 세상은 과학의 발달과 대항해 시대의 지리적 발견이 그리고 산업혁명의 대량생산으로 시대 구분상 근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이 이런 세상의 변화를 읽고 선진세계와 교류하며 발전하는 사이 세상의 과학적 실학적 발달의 추세도 모른 채 관념론적 성리학에 얽매여 갑론을박하던 신료들과 조정은 자국의 국토 지리적 상황조차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의령 일대의 정암진의 남강 방어를 위해 상거(相距)가 수 십리 넘는 삼가에 성을 쌓도록 명이 전해진 것이다.
백학산성 석축(石築) 흔적은 지리적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그 오류를 적시(摘示)하고 징비의 역사교훈 현장으로 보존할 가치를 지닌 곳이다. 삼가현의 백성들이 부역(負役)의 목적이 합리적이지 않음을 알고 홍문관에 상소하여 바로 잡은 역사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양루 주변 정비사업 소식에 덧붙여 당시 남부여대(男負女戴) 무거운 돌을 산정까지 날랐을 선조(先祖)들의 고난 자취를 서애(西厓) 선생의 글에 의지하여 추정해보았다.
기양루의 북소리가 옛 사람들의 귓전을 스치고 흘러간 세월이 오래다. 그리고 백학산의 석축 흔적도 사 백여 년의 세월 속에 이끼 낀 바위로 남았을 뿐이다. 고향의 옛 역사의 자취가 이 시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는 모두에게 애향(愛鄕)의 추억과 더불어 시대의 아픔과 기쁨 모두를 담아 흘러온 양천강처럼 유구(悠久)하기 바란다.

이 현 철 _△삼가초, 삼가중, 대구고, 경북대 영어교육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영어교육 석사, 뉴질랜드 빅토리아 대학 Dip Tesl 과정 졸업, 동아대 대학원 영어영문학 박사학위취득 △마산여고 교사, 창신대 영어과 교수, 경남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겸임교수 △eleich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