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용암서원 묘정비, 의미 알리는 안내판 세워
조찬용 회장, “현 묘정비는남명학파의 서글픈 자화상”임을 기억하라
조찬용 남명선생선양회장은 지난 10월26일 삼가 용암서원에 세워져 있는 묘정비(廟庭碑: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서원 앞에 세운 비)와 관련해 새로운 안내판을 세웠다.
새로운 안내판을 세운 배경은 현재 세워져 있는 묘정비를 쓴 우암 송시열의 상징성과 묘정비 내용 중 당시 집권세력을 칭송하는 내용이 있는 것 등이 남명학파 및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조 회장은 “집권 노론세력들이 그들의 종주인 송시열이 지은 남명조선생신도비명을 뜬금없이 용암서원묘정비명으로 둔갑”시켰다. 또 “남명 조식을 배향하는 남명학파 성지(聖地)에 송시열을 비롯한 송익필 김익희 송치규를 칭송하는 내용을 말미에 추가로 새겨, 노론(서인)의 전승비(戰勝碑) 같은 조형물을 세운 것”으로 ‘역사에 대한 승자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비(碑)”라고 평가했다. 즉 역사적으로 서인, 노론 등 세력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북인 계열인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 등 남명학파를 우롱하는 ‘비’라고 본 것이다.
*원래 합천군에서 세운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합천 용암서원 묘정비陜川 龍巖書院 廟庭碑>
이 비석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1812년에 그를 향사하던 용암서원(龍巖書院) 묘정에 세워졌던 것이다. 1987년 합천댐 건설로 용암서원이 수몰되자 죽죽리 산26번지로 이전되었다가 용암서원이 복원됨으로해서 201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용암서원의 전신은 1576년에 세워진 회산서원(晦山書院)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에 향천서원(香川書院)이 세워졌다. 이 서원이 1609년에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 묘정비의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가운데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부분을 제외한 본문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삼가(三嘉) 현감 오철상(吳澈常)이 쓴 것이다.
*조찬용 회장이 새롭게 세운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 이른바 용암서원 묘정비(龍巖書院 廟庭碑)는 오철상 삼가현감 등 집권 노론세력들이 그들의 종주(宗主)인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조선생신도비명(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뜬금없이 용암서원묘정비명으로 둔갑시켜 1812년(순조12) 세웠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을 배향하는 남명학파 성지(聖地)에 송시열을 비롯한 송익필(宋翼弼) 김익희(金益熙) 송치규(宋穉圭)를 칭송하는 내용을 말미에 추가로 새겨, 노론(서인)의 전승비(戰勝碑) 같은 조형물을 세운 것이다.
역사에 대한 승자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비(碑)다.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 영의정) 등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서글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이 안내판을 세운다. (남명선생 선양회장 조찬용)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서원 앞에 세운 비. 일명 서원비라고도 한다.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는데, 당대의 인망이 높은 인사의 글을 받아 명필의 글씨로 새기는 것이 보통이다. 서원은 본래 선비들이 모여 강학(講學)하는 곳을 말하나 조선시대는 모든 학자들이 추앙하는 현인을 추모하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서원을 설립하는 데는 반드시 뜻이 앞서고 여기에 모시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며, 또 모든 유림의 뜻이 모아져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