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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욱 선생님과의 만남 – 이명재

문과대 강의실에서 문학론을
나는 중앙대학교에 진학한 1957년 가을 신학기에 문과대학 강의실에 드나들면서 직접 문인의 수업을 처음 들었다. 앞으로 법조계 진출을 바라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법정대학에 입학했어도 서대문형무소와 국회의사당 견학 후부터 전공 선택에 회의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휴전 이후의 흑석동에다 하얀 빌딩으로 신축해 올린 파이퍼 홀 5층 강의실 유리창 너머로는 푸른 한강을 건너 하얀 백사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보였다. 딱 한 자리만 남은 의자에 앉은 검정색 교복 차림의 신입생을 양쪽의 선배 여학생들이 낯설게 보는 것이야 다음이었다. 교육학과나 심리학과 철학과 상급생들이 선택하던 <문학개론> 강좌를 맡은 최인욱 선생의 강의는 속속들이 흥미롭게 다가들었다.
옛날 중국의 감승(甘繩)이라는 선비의 고사가 인상적이었다. 법조문 외우기나 사회적인 대인관계를 따지는 법정계열 강의와는 대조적이랄까. 감승은 벼룩 못지않은 이 한 마리를 잡아서는 검은 실에 꿰어서 문 옆에다 길게 달아매 놓고 여러 날을 두고 드나들 적마다 여러모로 살펴보았다 한다. 그러노라면 처음에는 희멀겋던 그 곤충이 여러 개 발로 굼실거리는 모양과 주름진 등어리만 보인다. 그러다가 며칠을 계속 들여다본 뒤에는 점차로 몇 발짝 물러서서도 각진 이마며 두 눈알이 보이다가 심줄을 타고 온몸에 피돌이 하는 것까지 생생히 꿰뚫어 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처럼 작가는 작품을 쓸 경우 역시 사물을 철저히 관찰하고 리얼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자연주의적 접근법을 보기로 든 내용이다.

습작품에 격찬을 듣고
최인욱 선생님과의 소중한 만남은 1958년 늦가을 어느 날, 흑석동 캠퍼스 앞의 중국집에서 가졌다. 대학 2학년이 된 학생은 그 해 2학기에 선생님이 강의하던 <현대소설론>을 청강하던 중인데 종강을 보름쯤 앞둔 무렵이었다. 작년에 1학년으로서 청강하던 <문학개론> 첫 강의 시간 때 바로 옆자리에 있던 김경숙 선배와 함께였다. 딴으론 용기를 내서 습작품 원고를 대학의 김 선배께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원고를 김 선배가 지난 주 강의 때 최 선생님께 점검해 달라고 넘겨준 모양이었다. 작품은 등록금 문제 때문에 그 학기를 마치고 곧 시골집으로 낙향해서 휴학할 자신의 심경을 쓴 「낙향 이전」. 그 습작품을 잘 읽었노라며 현관을 나오면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점심은 내가 살 거야. 날 따라오게, 이군 작품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지.” 식당에 자리 잡고 앉은 선생님은 점심을 주문한 시간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중앙대에 출강한 지 여러 해지만 그동안에 받아 읽은 학생들 습작품 중에서는 가장 인상적이고 좋았어요, ……물론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게 아니고 그 가능성을 봐서 말이요.”

그 말씀을 듣고 원고 봉투를 건네받으면서 학생은 잠자코 식사만 했었다. 그때 가게 주인에게 손목시계라도 맡기고 점심값을 치를 걸, 스스로 탓하면서 오랜 마음의 빚으로 품고 있다.
최인욱(崔仁旭, 1920~1972) 선생은 한때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전임강사로 강의하고 단국대 밖에 중앙대 문리대에도 1950년대 중반 이후 20년 가까이 출강한 작가이다. 그 무렵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현대 단편소설의 특질」이란 글이 실린 만큼 문학 이론까지 갖춘 분이다. 경남 합천 태생으로 그 지방의 해인불교전문학원 고등과를 졸업한 문학도로서 김동리 작가 등과 친숙한 해인사 그룹 문인이다. 한동안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에서도 수학해서 남달리 불교나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이력을 지녔다.
6.25 한국전쟁 때는 공군문인작가단의 창공구락부 사무국장으로서 조지훈 마해송 최정희 박두진 김동리 유주현 등과 종군 활동도 했다. 그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문학예술 등, 여러 문예지 추천위원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선생께서는 누구보다도 왕성한 전업 작가로서 당시 각 문예지와 여러 신문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단행본으로 낸 연보를 살필 수 있다.
최인욱 선생은 1939년에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단편 「산신령」이 당선된 이후 자연과 회고적인 옛 정취를 살린 단편 「月下吹笛圖」 등을 발표해서 인정받았다. 광복 이후에는 역사장편소설 『임꺽정(林巨正)』 등과 신문연재를 통한 장편소설을 자주 발표한 중견 소설가이다. 장편 및 소설집으로 『죄의 고백』(백조사, 1952), 『底流』(흥국예술협회, 1953), 『행복의 위치』(인문각, 1957), 장편 『草笛』(1961), 『죄의 고백』(아동문화사, 1962), 장편 『임꺽정』(교문사, 1965), 『황혼의 연가』(선일문화사, 1974), 장편 『전봉준』(평민사, 1983), 장편 『자규야 알랴마는』(어문각, 1988) 등이 있다. 이밖에 나는 최인욱 번역, 역주한 중국 황견 편의 『古文眞寶』 (1964 출간 이후 10판, 1971)를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펴던 선생께서는 50대 초반에 신병으로 작고한 탓에 창작 상의 이상은 다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대 사학과를 졸업한 장남 최광선 등, 여러 자녀가 있지만 오래도록 소식이 끊겨서 궁금하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우연히 안병국교수를 만나서 이야기 중에 안 박사와 동향이신 최인욱선생님에 대한 남다른 배려에 문득 깨우쳤다. 바로 올해가 합천이 낳은 최인욱 작가님의 탄신 100주년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무관심했던가.

선생님과의 친소관계
선생과의 만남 이후로 스스로 시골집에 내려온 필자는 머슴 대신에 수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자진 입대해서 전방 근무 후에 제대한 다음에 복학해서도 가끔은 선생님을 뵙곤 했다. 후배 한둘과 소주를 사들고 상도동 중턱의 조촐한 문화주택인 선생님 댁을 찾았다. 으레 원고를 쓰시다 말고 비좁은 서재에서 거실로 나온 선생께선 한복 마고자에 감색 바지 차림이셨다. 선비 책상에 양반 다리 자세로 차를 드시거나 술잔을 권하던 모습이 선하다. 대화 중에도 신문사 연재소설 원고 독촉과 단행본의 교열비나 인세 이야기로 통화하던 목소리가 쟁쟁하다.
그런 이후 대학연구소의 간사로 일하던 제자가 1972년 어느 날 선생님께서 위중하시단 전갈을 받고 병실을 찾았다. 기진한 목소리로 겨우 목숨은 건졌다며 반기시던 선생께서는 며칠 후에 향년 52세라는 아쉬움을 남긴 채 이승을 하직하셨다. 그렇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처지에서 밤낮으로 원고 쓰기에 시달린 결과라 여겨져서 안쓰러웠다. 그 무렵 사모님 밑에 학교에 다니던 자녀도 여러 명이었다.
“하남(河南) 최상천(崔相天), 너무 빨리 떠났어. 이 안타까움을 어떡허나 말이야!” 상도동 빈소에서 처연해 하던 김동리 선생의 모습에서 1940년대를 함께 칩거하며 작가의 꿈 펴기를 도모하던 해인사 그룹 작가의 결기를 읽었다. 옆자리의 몸집 작은 이봉구 선생은 아까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며 불콰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최인욱 선생님께 고마움과 뒤늦은 사과를 드리고 싶다. 약관의 철없는 문학도에게 첫 문인 만남의 인연으로 격려해 주셨는데도 선생께 무심했다. 딴은 강단에서 자주 뵌 교수님들만 위하고 혼자 외롭게 글쓰기로 지내는 선생엔 소홀했다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애송이로 청강했던 <문학개론>과 <현대소설론> 강좌를 1980년대 전후부터 제자가 고스란히 맡게 된 사실이 어찌 우연인가.
이 사연 역시 회고의 글을 쓰는 이제야 깨우치게 되니, 문득 부끄럽고 뉘우침이 앞선다. 이런 허물은 혹여 정규 학점이나 정식 지도교수가 아니라서 소홀했던 탓일까. 석사 지도교수님으로 한결같이 섬겨드린 백철 은사님이나 박사학위 교수님으로 모셔온 황순원 선생님과의 선근 인연과는 다른 것일까. 돌이켜보면 불혹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평론가로 올라서기보다 이순 후에 <한국소설>을 통해서 엄청 늦깎이 작가로 발돋움한 데는 최인욱 선생님의 동기 부여가 먼저였으니. 처음 뵌 작가께 강의 듣고 점심에다 맨 먼저 습작품도 과분한 평으로 격려해 주신 선생님.

뒤늦은 다짐으로 인사드리며
평소 마음에 켕겨있던 일도 이참에 진솔하게 고백해 두고 싶다. 그것은 제자가 복학한 1965년 가을의 일이다. 우리 대학 개교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된 작품을 두고 수준에 못 미친다는 평을 대학신문에 낸 것이다. 당시 학생으로서는 우리 위상을 위해서 작품 수준을 높이자는 견해를 밝혔을 뿐 다른 저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작품을 뽑으신 선생님께는 여간 민망하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선생님께 사과드렸더니 말씀 없이 냉담하셨던 듯싶다. 하지만 문병 갔을 적에는 그런 내색 없이 반기셔서 마음이 놓였다. 다만 돌아가시기 전 몇 해만 제자 나름의 여러 일로 쫓겼던 탓에 선생님의 출강 여부마저 챙기지 못한 불찰이 뉘우쳐진다.
아무쪼록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지상에 남은 작품들이 거듭나서 잘 활용되길 바란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너무 늦은 인사가 미안한 대로 선생께 품은 마음을 전했다 싶어 후련하다. 이젠 제자 스스로 연구와 평론에 분산해온 힘을 되도록 창작에 모아 두세 권쯤 좋은 작품집을 내서 최 선생님이나 황순원 선생님께 보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