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풍경이 있는 추억의 정양 늪 – 임영희(합천읍 거주)
황강을 가로지른 남정교 다리를 건너면 정양늪이 있다. 대양면 정양리 위치에 있으며, 예전에는 정양 강으로 불리었다. 당시는 강물도 맑고 물고기도 많아 바로 옆 도로변에는 민물 횟집도 군데군데 있었다.
어른들은 읍에 나가거나 장날에는 그곳을 들리곤 했다. 회 한 접시와 막걸리로 고단함을 잊고, 기분 좋아하시던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또 강의 배경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지나는 길손들에게 더없이 좋은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강가 나루터에는 송판으로 만든 목선 몇 척이 메어있었다. 민물고기를 잡거나 말밤을 딸 때 사용하는 배였다. 구월 초순 햇볕이 유난히 따끈따끈하던 어느 토요일 이른 오후,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강 나루터 앞까지 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56년전) 중 1년 소녀들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배를 타고 말밤을 따기로 했다. 책가방은 강가에 던져놓고, 주인 몰래 목선을 탔다. 긴 장대로 노를 휘저으며 강 가운데로 배를 몰아 들어갔다. 마냥 신나고 즐겁기만 할 때였다.
먼 데서 거친 고성이 들려왔다. 배 주인인 것 같았다. 우리는 놀라고 당황하여 쏜살같이 강가로 나왔다. 배가 채 멈추기도 전에 황급히 뛰어내려 도망쳤다. 제법 멀리 뛰어가서 멈추어 섰다. 막 숨을 고르고 보니, 운동화와 교복 치마가 다 젖었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두르다 배에서 잘못 뛰어내려 옷이 젖은 것이다. 젖은 옷을 짜서 햇볕에 말려 입고 깔깔대던 그때가,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토막으로 떠 오른다.
강에는 말밤도 많았다. 부근 마을 사람들은 따다가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인근 마을 사람들의 생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한 움큼씩 종이에 담은 말밤을, 이원씩 주고 사 와서는 큰 바위에 걸터앉아 까먹곤 했다. 강에서 채취한 말밤(마름의열매)은, 신기하게도 밤나무에서 딴 알밤과 맛이 똑같았다. 생김새는 다섯 개의 모가 불쑥 튀어나와 별 모양과 비슷했다. 껍질은 단단하여 칼로 반을 잘라야만 먹을 수 있는 불편함도 있지만, 그때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강 위쪽 얕은 습지에는 논 고등(우렁이과)과 올비도 많았다. 초등 2학년 때는, 집으로 가는 길에 가끔은 고등도 줍고 올비도 캤다.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어, 손수건이나 양말을 벗어 싸곤 했다.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고, 얼굴 콧등에 진흙이 묻혀도, 그저 재밌고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아련한 추억도 회상해 본다.
옛 강의 주변은, 지금은 정양늪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생태학습관, 정양늪 생명길, 관찰데크, 주차장, 조류탐조대, 꽂터널, 탐방로 등, 많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나는 이곳을 자주 찾는 편이다. 탐방로를 걸으며 사색을 즐긴다. 물에서 자란 각각의 수풀은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고. 낮은 냇버들은 물속에서 큰 숲을 이루고 있다.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높고 낮은 산들은 겹겹이 펼쳐있고, 낮은 산자락 위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떠 간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작은 멧새들은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바쁘게 나른다. 짹짹, 새들의 맑고 아름다운 음유에 내 귀는 호강한다.
봄이면 수생식물들이 연두색 고운 옷으로 늪을 단장하고, 여름에는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고귀한 연꽃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도 하고, 카메라에 담아보기도 했다. 가을이면, 늪의 부들은 핫도그(부들의열매)가 되고, 억새도 할아버지가 되었다. 강 건너 굴참나무 가을 산이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참 우아하다. 맑은 아침이면 산 그림자가 내려와 강에다 아름다운 산수화도 그려 놓았다. 목재 테크를 지나 징검다리 건너면, 산밑 둘레길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낙엽을 밟으며, 잠시나마 옛 추억에 잠겨 본다.
이어진 둘레길에서 또 다른 징검다리 건너면, 정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여기는, 내 어린 시절의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초등 사학년 때다. 아천리 사는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갈 때였다. 정양리 마을 앞에서 아천리로 가는 길은, 나지막한 강가를 따라 있었다.
그날은 비온뒤라 강물이 길에 닿을 정도로 많았다. 갑자기 큰 붕어 떼들이 길 가장자리까지 모여들었다.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았다. 처음 본 광경이라 참 신기했다. 호기심에 물고기를 잡기로 작정했다.
강가에 바짝 다가앉아, 붕어 떼가 가까이 오기만 기다렸다. 물고기는 몰려 왔다가 달아나고, 몰려 왔다가 달아나고를 반복하고, 우리는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친구를 보니 네 마리나 잡았다. 부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시간은 한나절이 지나 배도 출출했다. 그날 밤은 물고기 잡는 꿈도 꾸었다,
겨울에는 철새들이 많이 날아와 장관을 이룬다. 그중에서 큰 고니와 청둥오리의 무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숫자다. 어림잡아 사백여 마리가 넘는 큰고니는 늪 절반을 하얗게 물들였다. 어떤 녀석은 부리를 물속에 박은 채 거꾸로 물속에 잠겨 있고. 또 어떤 녀석은 수면에 앉아 날개로 부채질만 하고 있다. 가끔은 얘 일곱 마리가, 가끔은 일개 중대가 되어, 하늘 높이 날며 곡예도 한다. 그러다 몇 마리씩 낮게 늪 위를 배회하기도 하고, 무리 지어 날기도 한다. 마치 운동회라도 하는 것 같다.
청둥오리는 이곳저곳에 크게 무리 지어, 강 위를 천천히 누비며 먹이를 쫓거나 한가롭게 놀고 있다. 새끼 청둥오리들은, 가만히 들여다보니 헤엄이 서툴다. 몸통은 보이지 않고 머리만 보일 듯, 말 듯, 아장아장 노닌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차마 눈을 떼기조차 아쉬웠다.
언제 날아왔는지 매 한 마리가 창공을 두 바꿔 비행하다가 멀리 사라지고, 기러기 떼도 질서 정연하게 ㄱ자 줄을 서며 창공을 날아간다.
물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 없으며, 모든 만물은 때가 되면 오고 간다. 섭리와 이치를 배우며, 깨달으며, 자연에 고마움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