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머님 영전에 무릎꿇고 – 정병수 재경 합천문인회 회원
그리운 어머님!
요즘 날씨가 쌀쌀합니다. 오늘은 어머님의 탈상제(脫喪祭) 날입니다. 작년 가을에 머나먼 세상으로 떠나신 지 어언 5개월이 흘렀습니다. 장례식 이후 빈소(殯所)나 산소도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천리 먼 길 서울에서 공부하다보니 불효를 하게 됐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서울 큰형님과 형수, 작은 형님과 형수 그리고 동생 병원이는 큰 변고 없이 모두 잘 지내고 있으며, 저 역시 어머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효 삼남 병수가 어머님 영전에 이렇게 무릎 꿇고 눈물을 닦고 있습니다. 어머님 생전에 아무 도움을 드리지 못한 죄스러움과 이제 다시는 영원히 뵐 수 없다는 서러움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아무리 불러봐도 아무 대답이 없네요. 오늘따라 살아계실 때의 어머님 모습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제가 대문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병수, 아이가?” 하며 방문이 부서져라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이 못난 자식의 손목을 잡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으시던 어머님이셨습니다. 제 손을 잡고 연신 어깨를 두드리는 어머님의 손은 비록 일에 찌들어 거칠고 투박했지만 언제나 사랑과 포근함이 가득해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지요.
“어머이 보러 오느라고 고생했제? 배 고프제?”
나는 아니라고 해도, 황급히 정지(부엌)에 들어가 차려온 식사라곤 보리밥에 김치와 된장국이 다 였지요. 비록 보리밥이었지만 그 어떤 진수성찬도 어머님이 차려주신 식사에 비교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환한 미소도 그 인자한 모습도 볼수 없게 되었고, 그 맛있는 식사도 더이상 기대할 수 없으니 슬프네요.
불러도 대답없는 어머님!
저희들을 두고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곤 하지만 회갑연을 채 반년도 안 남긴 상태에서 정녕 타계해야 했습니까? 하느님도 무심하고 부처님도 원망스럽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11남매의 어머니자 11대 종부로 밤낮으로 뒤치닥거리 하시느라 온갖 고생을 자처하신 어머님의 그 묵묵하고 우둔한 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적지 않은 식구에 머슴까지 있는 자급자족하던 정통 농가엔 하루 세 끼 식사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낮엔 논일 밭일에, 저녁이면 빨래며 다리미질 길쌈 등에 여념이 없는 데다, 적어도 1달에 1번 이상 다가오는 제사상 준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만 하시고 떠나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비통하고 안타까워 이렇게 목놓아 웁니다.
어머님! 못난 자식이지만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진학한 저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며 자랑스러워 하셨습니까? 그래서 제 대학 졸업식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하시겠다고 하셨던 그 말씀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 졸업식이 일 년도 남지 않았는데 그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시다니, 정녕 슬프고 안타까워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 어느 자식에게 어머님이 훌륭하지 않으리오마는, 우리 어머님은 한글도 모르면서 자식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초행길인데도 혼자 서울로 부산으로 대전으로 찾아 오셨지요. 게다가 심한 차멀미까지 하면서도 자식의 일이라면 천리를 멀다 않고 다니시던 용감한 어머님이시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자식은 어머님의 위대하고 크신 사랑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떳떳이 살아가겠습니다.
일평생 동안 지아비를 무서워리 만치 순종했으면서도 남 흉볼 줄 모르고 궃은 일에는 늘 앞장서 감당하시었습니다. 더구나 아버님이 어머님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할 때도 소리없이 잘 참아 내셨습니다. 속으로는 수심과 고통을 가졌으면서도 결코 겉으로 드러내 보이시지 않았던 어머님이셨습니다. 또한 그 어떤 훌륭한 선생님도 해주지 않았던 어머니의 교훈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병수야! 서울 생할이 힘들지?”
“아니요. 농사 짓는 것에 비하면 공부란 아무 것도 아닌데요.”
“그래? 편안하게 생각해라. 너 말 안 해도 네가 마음 고생하는 것 내 다 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니 항상 위로 보고 생각하되, 아래로 보고 생활해라.” 어머님, 감사합니다. 어머님의 그 말씀을 평생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쪽엔 빨간 카네이션, 다른 한쪽 가슴엔 하얀 카네이션을 달아야 함을 생각하니 자꾸만 자꾸만 목이 메입니다.
어머님! 어머님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수도통합병원에서 담당의사가 간디스토마라고 진찰결과를 알려주었을 때 저는 얼마나 안도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까짓 병이면 쉽게 나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형선고일 줄이야! 그러나 차마 그렇다고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던 일이며 그 후에도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의원을 다니시면서 그렇게 잡수시고 싶어하는 수박을 의사가 해롭다고 하여 사드리지 못한 일 등등.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사드릴 걸!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수포요 후회뿐입니다. 얼마나 병마에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던 긴 머리카락을 잘랐을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듯 합니다.
“반중조홍 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노라”라는 시조가 오늘따라 이리도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몸부림친들 억만년을 운들 어머님이 다시 돌아오실 리 없겠기에 못난 이 자식이 미워지고 이렇게 어머님의 영전에서 북받치는 슬픔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어머님께서 보여주신 헌신적인 밀알 정신을 이어받아 어머님께 욕되지 않는 삼남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분명 어머님께선 극락에 가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육신이 잠든 묘소에는 봄이면 꽃이 피고 또 언젠가는 아버님과 저희 형제자매들이 어머님과 함께 웃음 꽃 필 때가 있겠지요? 부디 저승에나마 이승에서 못한 장수(長壽)를 다 하시기를 삼가 기원하며 무딘 삼남의 넋두리를 여기에서 마칩니다. 1979년 2월. 삼남 병수 올림
(본 원고는 42년 전 필자가 대학 3학년 때, 어머님 탈상제에 올린 조사입니다.
이번에 부분적으로 가필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