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운잡기| 「방랑시인 김삿갓」 연재를 읽고 – 권해조 논설위원
필자는 지난해 여름부터 몇 개월간 정현규 재경향우가 모교인 삼산초교총동문회 카톡방에 연재(1회-200회)한 ‘방랑시인 김삿갓’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김삿갓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자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 자는 성심(性深)이며 호는 난고(蘭皐)이다.
김삿갓에 대해서는 KBS에서 1964년 5월부터 약 30년간 11,000여회의 「김삿갓 북한방랑기」 방송드라마를 하는 등 라디오드라마, 영화, 소설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노래까지도 만들어질 정도이다. 필자도 김삿갓에 대해서는 책도 보고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원작자로 필명이 심낙(尋樂)교수인 ‘방랑시인 김삿갓’을 매일 보면서 무더위에다 코로나까지 덮친 답답한 시간을 메꾸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김삿갓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파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주인공인 병연은 순조7년(1807) 김안근(金安根)과 함평이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병하(炳河), 동생은 병호(炳湖)이다. 6살 때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할아버지가 ‘홍경래 난’에 대항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고 집안이 큰 화(禍)를 입었다.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사면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집안에서까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안근(安根)이 수치심과 분노로 39세로 사망하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양평, 가평을 거쳐 강원도 두메산골로 찾아 들어갔다. 평창 미탄에서 조금 살다가 영월 삼옥리에 안착하여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살았다.
그런 내력도 모르고 성장한 병연은 스무 살에 강원도 영월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를 하였으며, 시제(詩題)가 ‘홍경래 난’ 때 투항했던 김익순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처자식을 버리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책하며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쓰고 죽장을 벗 삼아 다녔기 때문에 「김삿갓」이란 별명을 얻었다.
연재한 많은 내용에서 몇 개만 소개하고자 한다. 제1회에서 병연은 어머니에게 장원급제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조부에 대한 내력을 알려주었다. 병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괴로운 심정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와 처에게 “오늘 당신을 앞으로 고생시키지 않고 호강시키리라 생각했는데 모두가 허사가 되었구려. 장원급제의 기쁨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으며, 벼슬길도 아득하게 멀어지게 되었소..”하면서 슬픔에 잠겨있었다. 백일장의 시제가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성스런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아라(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였다.
그리고 병연은 앞길이 막힌 좌절감과 울분으로 고민하다가 맏아들 학균(翯均)이 태어난 직후 22세 때 가출을 단행했다. 그는 금강산에 대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오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묘하구나(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가 있다.
그리고 제199회 ‘귀천(歸天)’에서 전라도 화순 동복(同福)에 있는 적벽강(赤壁江)에서 혼자 조그만 배를 타고 노를 저어며,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에 상쾌감을 느끼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그윽이 바라보며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하여 옛 시 한수를 생각하며 ‘구름은 넓고 넓은 데를 어디로 가는 고, 하늘가 아득히 난새 소리 들려오네! (雲山造造何處歸, 但聞空際綵鸞聲)’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읊었다.
마지막 200회에서 김삿갓이 세상을 떠나면서 혼미한 의식 속에서 죽음을 대비하여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미리 써둔 마지막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인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집이 있건만 (鳥巢獸巢皆有居),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았노라(顧我平生獨自傷), 짚신에 지팡이 끌고 천리 길을 떠돌며(芒鞋竹杖路千里),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였다.(水城雲心家中方)…’을 읊다가 눈을 감았는데, 잠시 뒤 누군가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저 하얀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乘彼白雲 羽化登仙)’란 읊조리는 소리를 듣고 다시 몸을 꿈틀하면서 입속말로 중얼거리다 운명하였다. 22세에 방랑길을 떠난 지 35년만이었다.
그는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함경도의 각지의 서당을 순방하며 떠돌다가 4년 뒤 24세 때 일단 귀향하여 1년간 머물다가 둘째 아들 익균(翼均)을 두었다. 다시 고향을 떠나 한양, 평안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로 방랑길에 오른 뒤에 차남이 몇 번 찾아 갔으나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때로는 그 당시 사회로부터 천대받던 기녀의 집에서 시문답을 하며 얹혀 살기도하고 사랑채에서 훈장노릇도 하면서 떠돌던 그는 57세를 일기로 화순 동복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2년 뒤에 익균이 아버지 유해를 옮겨와 제2의 고향인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 1리 태백산 기슭 노루목에 안장하여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필자는 천생의 풍류객이 고달픈 방랑길을 멈추고 영원히 잠든 노루목 묘지를 몇 년 전에 방문하였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수많은 시비와 기념비가 서있고 서낭당도 한 채가 있다. 묘소를 지나 어둔리 선락골을 지나면 선래골이 나온다. 이곳은 김삿갓 일가가 삼옥리를 떠나 살던 집터가 있는 곳이다.
김삿갓도 할아버지가 역적으로 처형당하지 않았다면 남들처럼 과거를 보고 출세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하 명산을 이웃집 다니듯 하면서 절승경개를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많은 시를 짓고, 한 조각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일생을 방랑하며 시를 읊은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는 하늘을 지붕 삼고 술을 벗 삼아 조선 팔도를 떠돌면서 풍자와 해악으로 당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래서 그를 민중 시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가출자’가 아닌 우리나라 문학사상 몇 안 되는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난국을 헤쳐 나가는 지혜와 품격 높은 해학을 가진 위대한 분이시다. 그가 떠난 지 158년 지난 지금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