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역사다(1)| 638 안케패스 작전과 산을 이룬 시체 – 권길홍 수필가
전쟁후 가난, 하고싶어도 할 수 없었던 공부, 월남전 파병, 개발지상주의 폐해, 민주주의 항거 등 한국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현재 20여 년의 공직을 마무리 짓고 귀촌했다. 국민소득3만달러를 돌파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어떤 고난과 아픔을 가졌는지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역사다./권길홍=gapowon@naver.com
이 글을 쓰려니 우선 마음 깊이 파고드는 감정은 허망함이다. 내가 겪은 그 일과 지금의 세상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 당시에는 마음을 후벼파는 고통스런 경험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데, 주위를 돌아보면 어느새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런 일들은 까맣게 잊혀진 듯하다. 이제 겨우 45년을 조금 넘겼을 뿐인데,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듯하다.
산을 이루었던 주검들. 그 주검의 주인들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평화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들인데, 지금 우리는 그들을 어찌 대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그저 죄송하고 미안한 사람은 정녕 나뿐인가?
638안케패스는 우리 맹호부대가 전투를 했던 월남의 1번 공로(베트남 남쪽의 사이공에서 북쪽 다낭까지의 주도로)와 이 도로를 동서로 교차하는 19번 도로의 중간에 위치한 산등성이 고지이다.
당시의 베트남 수도인 사이공에서 이 도로를 따라 달려가면 남베트남의 북부도시 다낭까지 단숨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월남인들에게는 교통상 중요한 길이었다. 다낭은 우리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조그만 고지는 우리 주월 한국군의 식량보급과 군수물자의 지원을 위해서나 주변의 고립된 부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도 한국군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곳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 미군은 월맹 수뇌부와 휴전협상을 계속했다. 월남에서 철수할 때가 머지않은 것을 예상하며 우리 군도 월남을 떠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허점을 노려 월맹정규군들이 기습을 한 것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이 고지를 포위했다.
아무리 철수 직전의 전황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귀신 잡는 따이한이지 않나? 그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린 이겨야 했다. 이 고지 하나를 지켜내고 사수하기 위해 고지 아래의 우리 한국군들이 지원부대를 편성했다. 적들이 쏟아 붓다시피 갈겨대는 총탄 속을 뚫고, 또 포위된 진지 주변 정글에서 적들이 무한정 갈겨대는 총탄을 막으면서 638고지로 올라가야 하니 엄청난 위험이 뒤따랐다. 총알을 피하기 위해 모래가 채워진 드럼통을 방패삼아 굴리고 올라가며, 그 뒤에 엎드려 밀고 올라갔다. 베트콩들의 방해작전을 뚫고 부대의 진지에 남아 있는 부대원들에게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대낮에도 조명탄을 터뜨리며 식량을 투하했다.
이런 식의 맹렬한 대치 가운데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시체가 여기저기 쌓이고, 부상당한 전우를 구하고 죽은 전우의 시체를 찾아오기 위해 고지를 오르다가 또 다치거나 죽는 전쟁터였다. 아무리 총탄이 비 오듯 하는 전쟁터지만 전우를 버리고 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전우의 시체 하나하나마다 집념을 보이며 목숨을 건 수습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었다. 우리 맹호부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수습한 전사자를 한 곳에 모아두었다가 미군 경리단 장교에게 전사자의 수를 확인받아야 전사보상금을 타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우의 죽음에 정당한 값을 받기 위해 우리는 죽을 각오를 하면서 전사자의 시체를 안거나 업고서 귀대했다. 이 작전으로 인해 더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우리쪽 잘못도 있었다. 애초에 전사보상금을 더 받아내려고 우리 군에서 전사자 수를 부풀려 보고했던 것이다. 한국군의 전사자 수가 허황되다는 보고를 받은 미군은 태도를 바꾸었다. 미경리단에서 시체를 확인한 후 전사로 인정하고 보상금을 주기로 말이다.
생각하면 기막히고 참담한 일이다. 미국달러가 절실했던 거지나라가 구걸을 넘어 억지까지 부렸던 것이다. 속히 경제개발을 달성하려 했던 우리나라 군부의 결정이었다. 총이나 대포, 그리고 죽음까지도 오로지 부국강병이라는 현실의 잣대로만 보려했던 시절. 아깝게 스러져간 청춘들이 더욱 안타깝다.
전사자의 시체는 맹호 포병사령부 막사 뒤에 모아두었었다.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시체가 산을 이룬다는 말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건 진짜 산이었다! 살아있는 전우들을 위한 막사보다 더 큰 산! 그 압도적이고도 허망한 죽음의 모습이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아, 그 처참함, 그 아픔! 나는 뭘 해야 하나? 이 혼란스러운 현실 앞에서 나는 무얼 느끼고 말해야 하나?
그 얘기를 자세히 하려니 내가 눈물이 난다. 한나라의 거짓과 욕심이, 그리고 내 젊은 시절의 아픔이 이렇게 커다란 역사의 물줄기로 남을 줄은 몰랐었다. 그 시절에 내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의 국민들 모두 그 커다란 역사 위에 배를 띄워 여기까지 흘러왔다. 대의를 좇았든,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좇았든, 혹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든, 우리가 몸부림쳐온 모든 것이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처참한 기억은 각자의 뇌리에만 제각각 남아 있는 듯하다. 누군가가 내 대신 피를 흘린 일, 가족과 나라를 위해 꽃다운 청춘을 놓아버린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처럼, 잊기 위해 몸서리치는 늙은이한테나 집요하게 들러붙어 있는 기억. 그 기억을 끝까지 지고 가는 것이 살아남은 전우의 의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