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한국시의 질병에 대한 인식양상 (4) – 류해춘 성결대 교수
5.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개인의 질병체험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현실 앞에 열려 있어야 한다. 문학은 어려운 문장이나 언어로 현실과 벽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조망하면서 미래를 성찰하는 관점을 제시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체험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하면서 사고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훈련한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현실을 기준으로 과거에 만들었던 이론이나 시스템을 과감하게 바꾸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없애버릴 수도 있는 정신과 용기를 지녀야 한다.
이론이 현실의 상황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예견하면서 냉철한 자아성찰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를 분석하고 조망하는 문학으로 걸어가야 한다.
“옹졸한 나의 전통은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저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 김수영(1921~1968)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시인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3년 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통역(通譯), 잡지사, 신문사 등을 전전하며 시작(詩作)과 번역(飜譯)을 열심히 하였다. 시인은 포로수용소의 야전병원에서 다양한 병원의 모습을 체험하였다. 한국전쟁을 체험하면서 시인은 야전병원의 체계가 독일식에서 미국식으로 변하는 과정도 경험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한국의 의료시스템도 미국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시인은 한국의 의료체계가 미국의 의료체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는 환자들을 민중에, 의사를 문화정책에 비유하여 의료체계가 민중을 은밀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시인은 한국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병원생활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병원생활에서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로 몰아붙일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고 있다. 시인은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 등에 관한 거시적 담론인 망원경 대신에 현미경이라는 미시적인 담론으로 개인의 질병과 그에 대한 자아성찰을 보여주는 시선을 사용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는 시인이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으로서 체험한 병원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간호사와 함께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면서 간호사와 함께 병원체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이 간호사의 단순한 노동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을 본 정보원에게 포로경찰이 되라고 조롱당하고 있는 자신의 일상사를 호출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시선은 시인 자신이 1960년대 현실정치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과 1950년대 포로수용소에서 거저 접기와 스펀지 만드는 일과 거의 똑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자신과 여기에 은밀하게 개입하는 정치, 이 정치에 비켜서서 저항하는 태도는 야전병원에서의 체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개인 스스로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는 각자도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시선은 현미경처럼 개인의 질병과 병원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병원생활의 묘사는 개인이 공동체와 함께 질병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질병을 스스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체험과 치료과정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일상의 아주 면밀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질병에 대한 인식과 그 치료에 대한 소시민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의 심리묘사는 질병을 대하는 환자가 사회적 관계망보다는 소시민의 각자도생이라는 정신으로 질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처럼 시인은 질병을 극복하는 개인의 미세한 삶을 묘사하여 사회와 역사의 한 부분을 개인의 일상사로 대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