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가 곧 행복이다 (14) – 변명규
산삼 같은 인생, 희생과 양보 산삼 같은 인생
-행복 디지이너 최윤희 님
강원도에서 절친한 스님 한 분이 모처럼 서울에 와서 자리를 같이 했다. 헤어질 때 스님이 캔 산삼을 P씨와 같이 신문지에 말아 한 뿌리씩 선물로 받았다. P씨가 밤늦게 들어가 잠든 아내에게 산삼 이야기를 못한 채 이튿날 출근했다. 산삼일 것이라고 상상도 못한 아내가 ‘웬 도라지?’하고 고추장에 찍어 먹어 버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최윤희 씨 처음에는 웃으며 “너무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웃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이 왔다. 나야말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산삼 같은 남편, 산삼 같은 아이, 산삼 같은 친구를 도라지 취급하지 않았던가? 도라지는커녕 멸치로 간주하고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댄 적은 없었던가? 설령 도라지일지라도 내가 “심봤다!”하고 산삼으로 여긴다면 그들은 산삼이 될 것이 분명할 텐데! 그것이 바로 산삼 효과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후회한다. “아휴,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람 진국이었어. 사람 보는 눈이 왜 그렇게 없었을까? 쯧쯧.”
그가 만난 대안학교 교장 선생님은 정반대의 경험을 들려주었단다. 어느 날 학교에 전과 13범 조폭 두목이 들어왔다. 소주병을 바지 뒷춤에 숨겨 오질 않나, 러닝셔츠 차림으로 등교하질 않나. 학생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는 문제아였다. 교사들은 퇴학시키고자 건의했다. 그러나 30년 동안 야학을 경험한 교장 선생님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생을 부른 뒤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는 형님뻘인데 동생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주면 안 되겠나?” 차마 반말도 할 수 없어 부탁하듯 말했다. 학생은 책상을 발로 차며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거야.” 학생은 어떤 충고도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교장은 꿋꿋하게 소신을 밀고 나갔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 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개교기념일에는 표창장까지 주었다. “이 학생은 앞으로 선행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상을 주어 표창함.” 종이 한 장만 주면 찢어 버릴까 봐 액자까지 만들어 주었다. 상을 처음 받아본 학생은 감격에 목이 메었다. 부모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아들이 상을 다 받아 왔네? 세상에 이런 일이!’ 거실 중간에 걸어 두었다. 집에 오는 손님들이 한마디씩 했다. “우아. 이 집 아들 완전 달라졌네!” 학생은 점점 변하더니 자격증 세 개를 취득하고 전문대학에 합격했다.
학생은 잡초였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이 그를 산삼으로 여기고 계속 “심봤다!” 부르짖으니까 산삼이 된 것이다. 물론 잡초를 보고 ‘심봤다’를 백년 만년 부르짖어도 산삼이 될 리 만무하다. 변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한 것이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을 웬만하면 “심봤다!” 하고 존중하며 아껴 주자. 보잘 것 없는 잡초도 도라지로, 더덕으로, 마침내 산삼으로까지 변할 것이다.
희생과 양보
몇 년 전 애인과 난 나흘밖에 남지 않은 휴가를 어디서 보낼까 궁리했다. 그는 바다에 가고 싶어 했지만 난 미주리나 호수가 있는 돌로미테 국립공원에 가고 싶었다. 그는 흔쾌히 좋다 했고, 우리는 즉시 짐을 싸서 떠났다. 사진으로만 보던 돌로미테의 웅장하고 환상적인 풍경에 감동한 난 “날 위해 바다 보는 걸 포기해 줘 고맙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처럼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면 싸울 일이 없을 거야.” 그러자 그는 엉뚱하게도 “이건 희생이 아니라 양보야.”라고 했다. “그게 그거 아닐까?” 했더니 그는 가족이나 남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속에 복수의 칼날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계속되는 희생은 원망을 낳아 어느 순간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변하지만 양보는 내가 가진 것을 잃지 않고도 남이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있으니 서로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여행도 자신이 양보했기 때문에 우리 둘 다 행복할 수 있었던 거라고 확인시켜 줬다.
순간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한 우리 엄마, 아니 세상의 많은 엄마와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하는 삶을 포기하고 남편이나 자식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날카로운 원망을 품으며 사는 것일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에 대한 인정이나 보상을 받지 못할 때 얼마나 큰 분노를 느낄까?
상대를 향한 애정으로 시작한 희생이 분노의 씨앗이 된다면 희생은 그리 권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희생이 아닌 양보라 여기면 상황은 달라질지 모른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내도 상대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면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아, 바로 이거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양보야말로 더불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난 그날 이후 매일 행복하다. 남이 원하는 것을 해 줄 때마다 이것이 희생이 아닌 양보라 생각하니 잃은 것도, 원망도 없을뿐더러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하는 것 같다. 양보야, 고맙다. 좋은 생각(2015. 12월호)에서 이기
지금 고령화 사회에서 그 실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부인이 남편에게 얼마나 잘해 주는가. 한데 거기에는 일방적인 희생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퇴직하고 나면 부인이 몫을 지어 이혼을 신청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들려오는 사례다. 한평생 가정에서 살림 살고, 남편 뒤치다꺼리하고, 아이들 키워내느라 자기 생활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보가 아니고 희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양보는 곧 배려의 정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양보한다는 것 자체가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희생과 양보 어느 쪽 인생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양보와 배려는 천생연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