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노점상의 애환 – 이호석 수필가
노점상의 애환
내가 노점상을 처음 본 것은 1954년 초등 1학년 때였다. 물론 그때는 노점상이란 이름도 몰랐다. 당시 합천읍 소재지 도로는 모두 비포장도로였다. 길 양옆으로 크고 작은 하수구가 그대로 개방되어 있었고 하수구에는 각 가정에서 흘러나오는 거무충충한 더러운 물이 항상 고여 흐르고 있었다.
매일 하굣길에 보면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읍내 사는 동급생 아버지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나와 도로 옆 하수구 위에 두꺼운 널판자를 걸쳐놓고 그 위에서 장사를 했다. 반 평 남짓한 좌판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갖가지 과자며 껌, 풍선 등을 펼쳐놓고 있었다. 어떤 과자는 얇은 비닐 포장이 된 것도 있었지만, 일부는 그냥 놓여 있어 조금 불결한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같이 나오던 동급생 친구는 우리에게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자기 아버지 손수레 안에 책보를 던져놓고 그 위에 있는 과자를 예사로 집어 먹었다.
나와 마을 친구들은 돈이 없어 과자를 사 먹지도 못하면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눈요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며 쳐다보곤 했다. 과자를 파는 그 아버지와 아들인 동급생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자갈길 오리를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우리 아버지도 과자 장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그 친구의 가정이 너무 빈곤하여 아버지가 그 장사를 하여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다는 것과 길거리에서 그렇게 파는 것이 노점상인 줄 알았다.
그로부터 15여 년 후, 나는 노점상과 특별한 악연이 맺어졌다. 군에서 제대를 한 다음 해, 지역의 말단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고향인 합천읍사무소에서 25여 년간 토목직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읍·면사무소에는 직원 수도 적었고 근무 환경도 열악하여 토목직 공무원 한 사람이 관내 건설 업무 전반을 맡아야 했다.
여름철 수해 예방을 위해 하천 제방이나 취·배수문 등을 관리하는 업무는 물론 시가지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불법건축물 단속도 어려웠지만, 그중에서도 합천읍 소재지 도로 노점상 단속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는 지금 합천시장 뒷부분에 접해 있는 저잣거리와 그 앞 간선도로변에 노점상이 가장 많았다. 매일 늦은 오후가 되면 인근에서 생산되는 채소 등 각종 농산물을 가져 나와 좁은 보도에 펼쳐놓고 판매를 하여 행인들이 차도로 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읍사무소 공무원 대부분이 지역 출신이었다. 솔직히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잘 알기 때문에 노점상을 어느 정도 묵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부 주민과 언론사 기자 등이 군청이나 심지어는 경남도청에까지 전화하여 노점상 단속을 하지 않아 교통사고 위험이 높다며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직원들이 수시로 나가 단속을 해야 했다. 이때는 업무담당자인 내가 항상 앞장서야 했기 때문에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
특히 5일마다 열리는 합천 시장 날에는 대구 고령 거창 등지에서 많은 노점상인이 몰려와 시장 인근 도로 곳곳에 전을 펴 그 일대 모두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이런 날은 아침부터 읍 직원 모두가 현지에 나와 비상근무를 해야 했다. 외지 상인들이 도로변에 전을 펴지 못하도록 하고 시장 한쪽 구석 공터로 들어가라고 안내를 하지만, 사람이 별로 찾아들지 않는 그곳으로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항의를 해 그들과 오전 내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표를 의식하는 민선 군수와 의회 의원들이 탄생하면서 이러한 단속은 아주 느슨해졌다. 지금은 장날 외지에서 오는 노점 상인들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모두 차량으로 와서 도로변 곳곳에 세워놓고 차량 주변에서 바로 판매하거나 시장 주변 도로변에 물건을 내려놓고 팔고 있다.
지금은 내가 이 업무를 담당할 때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고, 노점상인들에 대한 내 생각도 180도 달라졌다. 그때는 단속의 대상이라 모두가 지겹고 밉게만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앞선다. 언제부터인가 손님이 없는 노점상 앞을 지날 때면 ‘이 양반이 오늘 얼마나 팔았을까. 얼마 팔지 못하고 집으로 가면 얼마나 발걸음이 무거울까?’ 하고 주제넘은 걱정도 자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40여 년 전의 노점상 단속행위가 정당한 공무수행이었고, 상인들도 대부분이 바뀌었지만, 그때의 행위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잠재해 있었고, 또 어릴 적 우리 집안일이 문득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60~70연대 우리 농촌은 너무나 어려웠고, 우리 집도 칠 남매 형제들과 부모님, 할머님 등 열 식구가 적은 농토에 농사를 지으면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 어릴 적 여름이나 가을철이 되면 아버지는 종종 가지를 따거나 고구마를 캐서 지게에 지고 오리 길을 걸어 합천읍 소재지에 팔러 가셨다. 가져간 물건을 모두 제값으로 팔고 오신 날은 막걸리도 한잔하시고 기분이 좋으셨지만, 제대로 팔지 못하였을 때는 서글픔과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오셨다. 이럴 때는 가족 모두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고 집안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나는 가끔 그때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콧등이 찡해진다. 그리고 지금의 노점상인들을 보면서 이분들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딸린 가족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의 얼굴을 살핀 것처럼 오늘 이분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어떤 표정으로 갈까, 또 맞이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온갖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나는 평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평상복 바지나 셔츠 등 간단한 생활용품을 가급적 시장 변두리 노점상에서 산다. 그리고 꼭 ‘많이 팔라’며 따뜻한 격려의 말도 잊지 않는다. 비록 내가 산 물품 대금이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이지만, 이분이 집으로 돌아갈 때 조금이라도 기분이 더 좋아져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밝은 얼굴로 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